결정적 증거 은폐·훼손 의혹… 러, 우크라 전투기 공격說로 역공
우크라 대통령 "사실 무근" 반박… 서방, 對러 추가 제재 온도 차
우크라이나 반군이 수중에 있던 말레이시아항공 피격 여객기의 블랙박스와 시신을 국제조사단에 인계해 사고 원인 규명이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반군은 여전히 여객기 추락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증거 인멸을 우려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조사단의 즉각적인 현장 접근과 조사가 보장돼야 한다”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반군 블랙박스와 시신 인계
외신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반군은 여객기 추락현장에서 수습한 탑승자 시신과 블랙박스를 피해국 조사단에 인계했다. 사건 발생 나흘만인 21일 저녁 시신 200구 정도를 실은 냉동열차가 반군이 장악한 추락현장 인근 소도시 토레즈를 떠나 22일 낮 우크라이나 정부 관할지역인 하리코프에 도착했다. 시신은 하리코프에 설치된 네덜란드 조사본부가 항공편으로 네덜란드로 이송할 예정이다. 반군이 일방적인 주민투표를 거쳐 수립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알렉산드르 보로다이 총리는 22일 오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전달하는 조건으로 말레이시아 조사단에게 블랙박스를 넘겼다. 블랙박스는 영국 전문기관에 넘겨져 해독될 예정이라고 우크라이나 정부가 밝혔다.
블랙박스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 증거 훼손에 따라 정확한 사고 원인 규명이 어려워질 지 모른다는 우려는 여전하다. 블랙박스 분석만으로는 여객기가 누구의 어떤 공격으로 격추됐는지 알 수 없는데다, 국제조사단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추락현장 접근이 아직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파편 등의 주요 현장 증거 확보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데 결정적일 수 있다. 법의학전문가로 구성된 네덜란드 조사팀 3명은 추락현장 접근을 반군에 계속 거부당하다 이날 처음 현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반군은 기자들의 조사단 취재를 막는 등 현장을 계속 통제하고 있다.
현장 접근은 차단, 증거 감추기?
반군이 노리는 것은 현장에서 나올 수 있는 피격 관련 물증을 최대한 은폐하면서 시간을 끌어 자신들과 러시아에 쏟아질 국제적인 비난을 회피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국제사회가 여객기 피격에 반군과 러시아가 개입된 직간접적인 정황을 잇따라 제시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국제조사단에 현장을 공개했다 결정적인 물증이 포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파이낸셜타임스는 피격 지점 부근에서 한 주민이 발견한 파편을 사진으로 촬영해 런던의 전문가들에게 판독을 의뢰한 결과 비행기가 지대공 미사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흔적들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문제의 파편은 가로 세로 약 1m 크기로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있고 주변에 작은 구멍들과 검게 그을린 자국들이 남아 있다. 영국의 한 군사전문가는 “파편 중앙의 구멍이 부크 미사일에 맞았을 때 나타나는 흔적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우크라 “러시아 장교가 미사일 발사 버튼 눌러”
우크라이나는 22일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른 사람은 러시아 장교”라고 주장했다. 비탈리 나이다 정보안보국장은 이날 CNN과 인터뷰에서 “우리가 녹음한 러시아 장교와 모스크바 본부 사이의 대화에서 미사일 발사 몇 분 전 ‘비행기가 접근한다’는 러시아 장교의 보고가 있었다”며 “러시아는 일정한 속력과 방향으로 접근하는 이 비행기가 전투기가 아니란 점을 알았어야 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 녹음 파일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고 CNN은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를 부인한 뒤 “수호이(Su)-25가 말레이시아 여객기에서 불과 3~5km 떨어진 거리에서 비행했다”며 “전투기가 고도를 일시적으로 1만m로 높여 여객기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역공했다. 그러자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공군기는 당시 사건 현장 주변을 비행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유엔 안보리는 이날 러시아를 포함한 15개 이사국 만장일치로 “국제조사단의 즉각적인 현장 접근과 조사가 보장돼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현장을 통제ㆍ장악한 우크라이나 반군은 사건 현장을 훼손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안보리는 결의안에 당초 여객기 ‘격추’라는 표현을 썼으나 러시아가 국제조사에 선입견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해 ‘추락’으로 바꿨다. 또 ‘국제조사단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내용도 ‘우크라이나도 조사단에 참여하며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주도한다’로 변경됐다.
서방, 러시아 책임자 비자발급 중단 및 자산동결
유럽연합(EU)과 미국은 연일 러시아를 비난하며 강도 높은 제재를 검토 중이나 각국이 국익에 따라 입장이 달라 실효성 있는 제재가 될지는 미지수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러시아에 상륙함 공급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프랑스를 향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국가(러시아)와는 평소처럼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고 모든 우방들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며 무기수출 금지 등을 포함해 더 강도 높은 ‘3단계 제재’를 시작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역시 프랑스의 상륙함 수출 계획에 반대한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프랑스는 2011년 헬기 16대 탑재가 가능한 미스트랄급 상륙함 두 척을 12억유로(1조7,000억원)에 러시아에 판매하는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올해 10월 인도하기로 했으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방 국가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당장은 제재 수위가 상륙함 인도에 영향을 주는 정도는 아니다”며 기존 방침을 바꾸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EU는 일단 22일 외무장관 회의에서 “말레이 여객기 피격 사건에 관련된 러시아 책임자에게 비자발급 금지 및 자산 동결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미사일을 우크라이나 친러 반군에 공급한 러시아 인사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회원국간 견해 차로 러시아 경제를 겨냥한 제재안 도출에는 실패했다.
한편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는 이날 “민항기 피격이라는 충격적인 범죄행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침략과 불법 점령에서 비롯됐다”며 “다양하고 광범위한 러시아 단체를 제재할 것”이라고 독자 제재 방침을 밝혔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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