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2일 오전 8시10분쯤 짜증 섞인 목소리의 112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 청담동 주택가에 사는 신고자는 “(2m 정도 떨어진) 옆 건물 공사장 인부들이 30분째 시끄럽게 떠들어 주말에 잠도 못 자겠다”고 말했다.
신고를 접수한 청담파출소 경찰관들은 신축 공사장을 찾아 큰 소리로 수다를 떠는 조모(52)씨 등 인부 5명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경찰관은 “경범죄처벌법 중 ‘인근 소란’에 해당되지만 사안이 경미해 계도만 하겠다. 다만 민원 처리 근거는 남겨야 한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작업 반장 조씨만 “신분증이 없다. 주민번호를 부르겠다”면서 경찰관이 신원조회기에 주민번호를 한 번에 찍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귀를 덮은 덥수룩한 머리와 눈매 등이 조회기에 뜬 얼굴 생김새와 흡사했다. 조씨는 당당했지만 조회한 경찰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주민번호를 너무 또박또박 말해 외운 티가 났다는 것. 경찰관이 “정말 본인 맞냐”고 10여분간 추궁하자 조씨는 마지못해 “없다”던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조씨는 추가로 지문 확인을 요청 받자 “불쾌하다”고 버럭 화를 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경찰관은 “잠깐 동료들 없는 데로 가자”며 정중히 그를 건물 한쪽 귀퉁이로 안내했다. 그제서야 조씨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실토했다. 그는 “수배를 받고 있어 네 살 어린 친동생 신분증을 건넸다”고 털어놨다.
사업 실패로 공사판에 뛰어든 조씨는 2,000여만원에 이르는 사기와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 등 세 건의 수배가 떨어진 신세였다. 다만 C급 수배범이라 임의동행 대상은 아니었는데도 동생 신분증을 경찰관에 건네는 바람에 경찰차에 탈 수 밖에 없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조씨를 공문서 부정행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21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본인 확인절차는 어떤 경우든 반드시 정확하게 한다. 조씨는 경찰을 속이려다가 혐의만 더 늘린 셈”이라고 말했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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