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2기 내각은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의 투톱체제 시동과 친정체제 강화로 요약될 수 있다. 정치와 행정의 두 상이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 체제의 출범과 연관시켜 보는 관점이다. 황우여 의원의 사회부총리 내정이 그것이다. 시기적으로 김무성 의원이 당권을 거머쥔 직후다. 일방적이던 당청 관계의 협력과 견제의 교호적 상황으로의 전환 가능성과 중첩되는 장면이다. 당청 관계에서의 수직적 관계의 변화를 행정부와 청와대 관계의 위계적 구도로 상쇄하려는 ‘정치’가 보인다. 또 여권을 형성하는 당ㆍ정ㆍ청의 삼각축 중 당청 관계에서 정청 관계로 권력의 축을 이동시키는 전략이라는 유추도 가능하다.
한편 ‘정책’으로 ‘정치’를 상쇄해 나가려는 여권 권력지도의 패러다임의 변화도 읽혀진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 후보자 내정을 김무성 대표가 인지했느냐 여부가 그래서 정가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인사 정보를 전달받았는지 여부는 권력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당청과 정청의 중층적 관계의 역학관계는 정국 향배를 가를 분수령이 될 수 있다.
행정의 관점에서 보면 책임총리는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으로 봐야 한다. 책임총리나 책임장관으로 권력운용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제고시키려는 패러다임에 대한 의지도 동력도 상실됐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내각에 현직 국회의원이 임명되는 것은 우리 헌법 체계상 아무 하자가 없다. 순수 대통령제가 아닌 혼합형 대통령제가 권력구조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국무위원과 의원의 겸직을 허용하는 것은 내각제적 요소다. 근거조항은 역설적이게도 헌법 43조의 ‘국회의원은 법률이 정하는 직을 겸임할 수 없다’라는 겸직금지 조항이다. 취지가 국회의원의 다른 직 겸직을 금지하는 데 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단 국회법에서는 ‘법률이 정하는 직’에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을 제외함으로써 합법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국무위원과 의원의 겸직을 가능토록 했다. 대통령제의 전형적인 모델인 미국은 의원이 장관에 임명되면 의원직을 사퇴한다.
더구나 장관도 아닌 부총리에 현역 의원이자 직전까지 당의 지도부를 형성했던 인사를 포진시킨다면 정책수립 및 집행이 당의 논리와 선거를 의식한 정치논리에 좌우될 개연성이 높다. 경제, 사회, 교육, 문화는 국방, 외교, 통일 등의 외치적 요소를 제외하면 내치의 전부다. 이런 국정 전반이 선거승리를 위한 정책수립과 집행이라는 외생적 요인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대통령과 이념 및 정치철학을 공유하는 인물이 내각에 임명되는 것과 집권당에 소속된 현역 의원이 내각에 포진하는 것은 별개의 차원이다. 행정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대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권력구조의 문제는 각국이 처한 정치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특수성, 문화적 차이에 따라 상이한 정치과정과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단순히 제도공학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심층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중장기적으로 의원과 국무위원의 겸임은 폐지돼야 한다. 백번 양보해서 내각제적 장점을 살릴 제도적 여지를 남겨둔 것이라고 해석하더라도 실제 운용이 권력의 논리와 입맛에 따른 정치적 포석에서 운용돼 왔던 헌정사적 경험은 의원의 장관 겸직의 부적절성을 웅변한다.
참여정부 때 김근태, 정동영 두 의원의 보건복지부와 통일부 장관 발탁, 열린우리당 의장인 정세균 의원의 산업자원부 장관 임명도 좋은 예다. 부처의 장관이 친정체제의 강화나 특정 정치인의 보은 차원에서 임명돼서는 안된다.
미국의 세계적인 정치학자 라스웰 교수는 정치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얻는가’에 대한 쟁투라고 했다. 정치에 대한 고전적 정의다. 그러나 라스웰의 정의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느냐에 대한 정치철학적 가치판단이 전제될 때 현실적 논리로 작동되는 것이다. 정치가 세력을 가진 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탐하는 기제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라스웰은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정치의 금도(襟度)는 역시 보편과 상식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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