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은 어느 시에서 ‘거울 속의 나는 외출 중이오’라고 쓴 적이 있다. 해석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문장에는 거울 속의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삶의 구체적 순간과는 멀어져 있다는 의미적 맥락이 ‘외출’로 표현된 것일 공산이 크다. 거울 속의 나는 분명히 현상적으로 존재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삶을 향해 현상 밖으로 외출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기행적 행각과 특이한 시적 표현으로 인해 시인 이상은 얼핏 보면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동시대로부터 늘 멀리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 시인 이상은 누구보다 삶에 대한 뜨거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예술은 생활을 통해 수렴된다. 삶의 구체적 순간과 닿아 있지 못한 예술은 벼랑에 매달린 꽃처럼 아름답지만 거기까지 닿지 못하는 자들에겐 난공불락의 교감을 강요하는 꼴이 되어 버릴 공산이 크다.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삶까지 끌어오는 인력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사는 편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예술을 상대로 부릴 수 있는 요술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대한 예술의 수심에는 삶을 관통하는 구체적인 순간들에게 보내는 어떤 예의 같은 것이 어룽거리기 마련이다. 예술이란 생활의 다른 면이 아니라, 생활의 다른 이름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으려면 말이다.
미셸 반던 에이크하우트는 삶의 구체적 순간은 교감이라고 이야기한다. 동물과 인간의 교감은 언어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어 너머의 감정에 대해 서로의 심상을 교환한다. 미셸은 사람과 짐승의 교감이라는 것은 수치와 통계로는 이해할 수 없고 모범답안으로 제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길들여지고, 애정을 나누고, 배려심이 생기는 차원은 서로에게 더 이상 언어로 설명하고 싶지 않는 부분이, 어떤 부분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는 때부터다. 세계에 대한 친연성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듯 하다.
예술이 삶의 구체적 순간에 닿아 어떤 언어를 만들어 가는 지에 대해 조금 더 농밀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시를 쓰는 나에게도 필요한 하나의 사례가 있다. 바로 이별에 관한 생각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이별한다. 지금은 유해(遺骸)가 된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이별의 능력이라는 근사한 시집도 세상에 있고, 이별의 재구성이라는 심오한 시집도 있다. 얼마 전엔 이별의 기술이라는 책도 세상에 나왔다. 사람들은 이별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만큼 이별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이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별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만큼.
“이별을 겪게 되면 어떤 눈들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행성으로 변해버려요.” “나는 어떤 행성으로 가서 이별을 하게 되었어요.” “맞아요. 그 행성은 내가 머무는 이, 별이더군요. 그게 내 참혹입니다.”
이별에 대해 당신과 내가 나눌 수 있는 잔여는 지금 여기다. “사랑이여 나는 나랑 잘 지내고 있어요.” 같은. 공자는 이별 후 수레에 한 무더기 책을 끌고 가서 강물에 버렸다고 하는데, 요즘 내 작문의 작의는 이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수 없다. 요즘 내 문장은 서로를 이별하기 위해 태어난 호흡들 같다. 시시해서 버려지는 시들처럼, 마침내 이별을 하고야 마는 연인처럼, 언젠가는 서로의 티셔츠 사이즈를 기억 속에서 잊어버리고 그 사람의 칫솔을 이제 그만 세면대의 컵 속에서 빼내는 일처럼, 나는 말할 테지. ‘그대여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수류탄을 던져야 끝날까?’ 어느 날 나는 당신에게 내야 땅볼처럼 굴러 갔다네, 당신은 언제나 외로운 외야수였으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이별하고 산다. 그래도 사랑하는 이의 입술과 머리칼의 질감은 잊지 말자. 그건 삶의 아주 구체적 순간에 해당한다. 분홍에 답하고, 연두에 울자. 초록에 첨벙, 파랑에 참혹이 될지라도. 당신을 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동자를 폐허로 바꿀 수도 있을테니.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달은 늘 가슴에 어미의 피를 순환시켜 주었습니다’ (함민복 시 ‘몸이 많이 아픈 밤’ 중에서)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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