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제정은 정의 실현을 위해서다. 강자와 다수가 법의 견제 대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힘이 법을 압도한다. 소수 약자는 자구해야 한다. 의리로 순응하든 연대로 저항하든.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에서 주인공 어니스트의 아내이며 화자인 에이비스가 “정의(right)는 법과 관계가 있지 않나요?”라고 묻자 어니스트는 “첫 글자를 잘못 썼어요”라고 답한다. “힘(might)이란 말인가요?”라고 에이비스는 다시 되물었다. 현실에서 힘과 정의는 잘 구별되지 않을 때가 많다. (…) 부당한 착취 앞에 침묵하면서 같은 학교라고 뭉치면 그게 의리인가. (…) 의리는 옳음(義)을 다스리는(理) 행동이 아니라 주로 패거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써먹는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단지 같은 지역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모임을 갖고 집단을 형성한다. (…) 슬프게도 의리는 ‘을’(으리)로 둔갑되어도 무방할 정도로 ‘힘’과 결연관계를 맺고 있다. 의리가 연대와는 다른 이유다. (…) 민족, 고향, 학교 등으로 얽힌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은 일종의 인맥 보험이지 ‘옳은 길’과는 무관하다. (…) 문제는 이해 대립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힘이 너무나 압도적인 상황이다. (…) 어딘가에 의리가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거대한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을 때 그 싸움을 모른 척하지 않기, 홀로 버거운 싸움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곧 연대라고 믿는다.”
-‘일시적 생존자’의 연대(한겨레 ‘야! 한국사회’ㆍ이라영 집필노동자) ☞ 전문 보기
“전통적으로 법치(法治)보다 덕치(德治)를 우선하던 유교의 영향은 점차 약화되고 있지만 법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며,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힘 있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준법보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경향 또한 여전하다. (…) 왜 민주주의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법치주의의 성숙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 그것은 무엇보다 법치가 곧 정의(正義)라는 인식이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이다. 국민의 법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위정자에게 있다. 집권층에 유리한 법을 만들어서 법의 내용적 정당성에 대한 불신을 낳고,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의 관행을 만들어 법은 가진 자의 도구라는 생각이 만연하게 만든 것도 위정자다. (…) 그 결과 국민도 법을 정의의 이념이 아니라 힘의 논리에 따라 만들고 적용하려고 한다. (…)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수결 원칙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의사는 민주적 정당성을 얻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 더욱이 법치는 다수의 결정이 정말로 정의와 합치하는지를 따짐으로써 소수자의 보호에도 만전을 기하고자 한다. (…)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갈등과 긴장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자의 상호 보완을 통해서만 인권의 존중, 인간의 존엄이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다.”
-민주주의만큼 성숙해야 할 法治主義(조선일보 ‘시론’ㆍ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전문 보기
혁신의 목적은 적폐 일소다. 기득권 세력한테 셀프 개혁을 맡길 순 없는 노릇. 회의체조차 불가하다는 극단론은 오염 걱정에서다. 그러나 나라 결단 낼 지도자의 결단은 결코 불가다.
“국가대개조 범국민위원회에 주어질 시간은 너무 짧다. 반면 위원회가 2년 안에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 위원회가 2년 안에 추진 방법과 절차까지 합의로 정하고, 개혁을 실질적으로 추진하며,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점검하고 감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무엇보다 위원회에서는 본질적인 개혁을 주장하기 어렵다. (…) 천년에 걸친 고대 로마의 개혁 역사를 면밀하게 분석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뿐 아니라 어떤 국가나 어떤 시대에도 개혁은 결코 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나아가 “모두가 찬성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 (…) 시간이 많든 적든지에 상관없이 위원회로 국가 대개조를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다. 정부가 아무리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위원회를 만들더라도 그 속에는 기득권 세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 금방 모든 것을 뜯어고치고 바꿀 것 같았던 벼락같은 자기비판에 대한 열정도 자신의 이념, 이해와 이익 앞에서는 고개 숙이기 마련이다. 정부가 개혁보다 더 장대한 대개조를 급작스럽게 결정한 것도 문제지만 위원회를 실행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더 문제이다. (…) 박근혜 대통령은 개혁에 대한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개혁의 과제는 박 대통령 자신이 던지는 것이다. 총리가 책임지는 위원회의 회의 결과를 기다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고독한 결단으로 과제를 만들고, 그것을 용기 있게 추진하는 것이 개혁이다.”
-위원회로 개혁을? 개혁은 회의로 하는 게 아닙니다(동아일보 ‘손태규의 직필직론’ㆍ단국대 교수(언론학)) ☞ 전문 보기
““이럴 거면 바쁜 사람들 모아놓고 회의는 뭣 하려고 합니까!” 지난해 8월, 기획재정부가 작성한 세법개정안 심의를 위해 민관 세제발전심의위원 수십 명이 명동 은행연합회에서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 주재로 회의를 할 때였다. (…) 회의 중에 어처구니 없는 사실이 드러났다. 부총리가 국회에 간다며 이내 자리를 뜨길래 설명을 들어보니, 개정안이 이미 국회와 언론 등에도 공표됐다는 것이었다. (…) 지난 얘기를 하는 건, 그렇게 처리된 개정안이 결국 현오석 경제팀 최악의 실패작이 되고 만 경위를 곱씹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발심위와 마찬가지로 정부 산하의 수많은 민관위원회가 실제론 정부의 들러리요, 거수기가 될 수밖에 없도록 운영되는 현실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 세월호 참사는 정상적 행정을 가로막는 ‘관피아’의 고질적 부작용과 부패, 말단 행정망의 무능, 만연한 안전불감증 등의 적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정부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쇄신이 절박함을 확인했다. 문제는 쇄신이 다시 한번 민관위원회에 맡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 본질적인 문제는 범국민위원회가 글자 그대로 전 국민의 여망을 담아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임한 학자나 몇몇 전문가들이 불려가 정부 계획에 박수나 치는 식이 돼선 안 된다. 정부 인사의 참여를 최소화 하되, 여야 정치권이 균형을 맞춰 핵심 위원들을 추천ㆍ선임하고, 그들이 분과위원들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위원회가 보다 구체적인 혁신 목표와 의제를 정하는 게 맞다. 시간이 걸리고 운영이 힘들어도 그러지 않으면 다시 한 번 공무원에 의한, 시늉뿐인 ‘셀프 개혁’에 그칠 수밖에 없다.”
-혁신, ‘핫바지 위원회’론 안 된다(한국일보 ‘메아리’ㆍ장인철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시간이 포개질 때 공간은 장소가 된다. 기억을 소환하지 못하는 길은 골목이 아니다. 구석구석 쌓인 일상의 자취가 아우라를 만든다. 쏙 닮은 것도 실존적 연결까지 재현할 순 없다.
“쿠바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1923~1985)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책은 마르코 폴로가 여행 중에 들렀던 도시들을 쿠빌라이 칸에게 묘사하며 들려주는 형식의 소설이다. (…) 그중에서도 ‘자이라’라는 도시를 설명하는 대목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 도시에 있는 높은 탑이나 형태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했다. “도시는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공간의 크기와 과거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단호히 얘기하며, 도시의 가치가 위대한 건축물 몇몇에 있는 게 아니라 “거리의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라고 황제에게 설명한다. 우리가 도시의 인상을 이야기할 때 거들떠보지 않는 작은 일상이나 평범한 길가에 그 도시의 가장 큰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사용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도시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빈터나 길가에 도시의 본질이 있다는 것, 그는 이를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시를 만들거나 설계할 때 중요한 것은 비움의 공간을 설정하는 것인데도 현대의 도시계획도에 비어져 있는 공간은 표현되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 목표의 달성을 핑계 삼아, 심지어는 오래된 길들도 죄다 없애고 직선의 도로로 만들며 골목길 풍경을 지워댔으니, 그 길에 새겨진 오랜 이야기도 기억도 역사도 그리고 결국은 우리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 도시의 길은, 그 길이 아무리 좁고 구부러졌다고 해도 오랜 시간을 지탱해온 이상, 우리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한 기억의 보물창고이며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 전국에서 골목길들이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 보이지 않던 도시들이 이제 보이게 된 것일까? 가히 골목의 시대가 왔다. 우려할 일은, 골목의 시대라 하여 억지 주제를 골목에 붙이며 관이 덤벼들 조짐을 보이는 것인데, 그렇게 과잉 반응을 보여 낭패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관은 부디 가만히 있으라. 보이지 않는 도시의 아름다움이니 보이게 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이탈로 칼비노는 누누이 강조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경향신문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ㆍ건축가(이로재대표)) ☞ 전문 보기
“온 나라에 골목 여행이 붐이다. ‘골목길 전쟁’이라고 할 만큼 지자체들의 예산 따기 경쟁, 코스 개발 경쟁도 치열하다. (…) 유명 예술인 생가를 비롯해 역사 유적, 현대사의 흔적 등 ‘이야기’만 퍼올릴 수 있다면 죄다 ‘골목’이 된다. (…) 이야기가 상품이 되니 너도나도 골목 만들기에 나섰다. 문제는 돈맛을 보자 골목 맛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 건축학자 임석재는 “골목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 질 녘, 딸내미 피아노의 똥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호박 써는 소리가 통통통 울리고,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퍼지고, 가끔 개가 멍멍 짖고, 집 밖에 널어놓은 빨개가 기분 좋게 말라가는 때…”라고 썼다. 골목의 부활은 반갑지만 거기서 고유의 일상이 사라지면 진정한 시간 여행은 이뤄질 수 없다.”
-골목길 투어(7월 15일자 조선일보 ‘만물상’ㆍ김윤덕 논설위원 겸 문화부 차장)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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