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부총리가 하필이면 지금 경기를 부양한다고 드라이브를 걸게 뭡니까.”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국은행의 한 간부는 이주열 총재가 마주한 껄끄러운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압축해 전했다. ‘정통 한은 맨의 귀환’이라는 말을 들으며 안팎의 기대감을 등에 업고 총재로 돌아온 지 어느새 100여일. 하지만 그는 지금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4월 취임한 이 총재는 그간 모두 네 차례의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며 기준금리 동결 결정을 잇달아 내리는 동안 이른바 ‘깜빡이’ 논란을 일으켜 시장에 혼선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시도 때도 없이 이전 시그널과 엇갈린 통화정책을 펼쳐 한은의 신뢰를 무너뜨렸던 전임 김중수 총재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총재 또한 표현 방식에 문제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5월 금통위 기자간담회에서 금리 인상 방향을 의미하는 발언을 해놓고 6월엔 “금리가 인상 방향이라 언급한 것은 올해 4.0% 성장률 전망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라 밝혀 시장 전문가들을 갸우뚱하게 했다. “경기회복세를 보일 경우 금리를 올려야 타당하다는 말을 시장에선 금리 인상으로 해석한 것 같다”는 해명도 이어졌다. 이 총재 본인도 오락가락했던 발언에 대해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자인했다.
그런 이 총재가 7월 금통위에선 금리 인하를 강하게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언론과 시장은 이견 없이 일치하는 해석을 내놓았다. 이 총재가 금리 인하 ‘깜빡이’를 켠 것은 어떻게든 경기를 부양하고야 말겠다는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의식했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실제 언론들은 일제히 이 총재가 정부와 정책 공조를 위해 사실상 금리 인하를 통한 경기부양에 나설 것임을 시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채권딜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8,9월 금통위에서 금리 인하가 단행될 것이라는데 배팅했다.
그러자 당사자인 한은 측은 깜짝 놀란 듯이 손을 내저었다. 한은 관계자들은 이주열 총재가 이 같은 상황을 매우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고 전한다. 한 간부는 “5월 금통위에서 금리 인상 방향으로 문을 열었듯이, 이번 금통위에서도 단지 인하의 가능성을 터놓았다는 점을 말한 것뿐인데 시장에선 당장 금리를 내리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며 “세계 어느 중앙은행도 한 번의 신호만으로 금리를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이 총재가 오락가락한 자신의 발언과 이에 대한 시장의 해석 탓에 다음 금통위에서 금리를 동결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봉착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외통수다. 그가 내달 금통위에서 금리를 동결한다면 7월 금통위 직후 “하방리스크가 예상보다 크다”며 잔뜩 시장을 금리 인하 쪽으로 몰아갔던 시그널과 배치된다. 더구나 물가상승률 등을 잘못 예측해 금리 인하 타이밍을 놓쳤다는 비난의 화살이 더해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금리를 내렸다간 더 큰 펀치가 기다린다. 친박 실세인 최경환 경제팀을 의식해 한국경제의 아킬레스건인 가계부채 악화를 감수하면서까지 경기 부양에 앞장섰다는 질책이 쏟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중앙은행의 생명은 ‘독립성’이다. 만일 금통위가 다음달 금리 인하를 택한다면, 자칫 한국은행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길지도 모른다. ‘외압에 따른 금리 결정’이라는 목소리가 확산되면서 독립성 논란이 커질 수도 있다. 일단 금리가 움직이면 최경환 부총리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최 부총리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인하할 타이밍에 금리를 움직이지 않을 수도 없고 참으로 난처하다"는 통화정책국 출신 간부의 말은 어쩌면 한은 전체가 최 부총리의 등장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최경환 경제팀이란 이름의 참외밭에서 신발끈이 풀려버린 이 총재의 다음 선택이 궁금해진다.
양홍주 경제부 차장대우 ㆍ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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