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소개팅은 그랬다. 주선자는 친구나 동료, 친척 혹은 건너서 아는 사람. 그러다 보니 마음에 안 들어도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잘 되다가 헤어지면 주선자와의 관계도 껄끄러워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소개팅이 계속 들어오면 다행이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먹을수록 소개팅 건수도 줄었다.
요즘 소개팅은 다르다. 지인 대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짝을 찾아준다. 지인처럼 군말이나 타박도 없고 심지어 상대의 성적 취향 등도 자세하게 알려준다. 잘 안 되더라도 될 때까지 소개를 받을 수 있다. 그저 일시적인 데이트용이라고 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물론 지인의 검증이 없다는 점은 꽤 큰 부담이긴 하지만. 최근 SNS에서 짝을 찾고 있는 20~30대 남녀의 사연을 모아 각색했다.
그 남자의 속내(27세, 취업준비생)
“자신 있는 신체 부위는 큰 눈과 잘록한 허리, 160㎝에 48㎏.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 연희동 고양이입니다.”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대목에 시선이 꽂혔다. 솔직히 이성을 만나는 데 나에겐 외모가 가장 중요하다. 내 소개와 이상형을 올리면 이성을 소개해주는 소셜 데이트 애플리케이션(앱)에 가입한 지 3개월째. 그간 5명이나 만났다. 처음에는 포토샵 사기를 많이 당했다. 나가보니 여신은 온데간데 없고 동네이모가 앉아있기도 했다. 만나기로 한 상대가 안 나온 적도 있다. 그래도 매일 새로운 사람을 소개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무덤덤해졌다.
요즘에는 매일 앱의 내 계정으로 날아오는 여성 프로필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사진을 보면서 친구들과 “얘 예쁠까?”라며 낄낄대는 재미도 있다. 이제 포토샵 사기 정도는 너끈히 걸러진다. ‘연희동 고양이’도 실물이 나을 것 같다.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소개를 성의 있게 꾸몄다면 일단 기본은 됐다는 얘기. ‘오케이(OK)’ 사인을 보냈다. 그녀도 ‘OK’ 한 모양. 속으로 ‘남자 보는 눈은 있네’라며 잠시 우쭐했다.
일단 연락처가 확보되면 SNS계정 탐색은 필수다. ‘셀카(스스로 찍은 사진)의 수와 미모는 비례한다’는 법칙을 따라보자.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 등에 셀카 사진이 여러 장 올라와 있다. 이제 그녀에게 짧게 메시지를 보낸다. 전화는 금물이다. 할 얘기도 없고, 부담된다.
“이렇게 연락이 오니 신기하네요.” 답장이 왔다. 일단 날씨나 근황을 살짝 주고 받는다. 당장 보자고 하면 만남이 급하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일주일 뒤 만났다. 이미 연인처럼 서로의 일과를 보고하며 메시지를 주고 받아온 터라 크게 떨리진 않았다. 유명 쇼핑몰 안 고급 커피숍. 사진과 거의 비슷한 그녀가 나왔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생기발랄함과 약간의 내숭이 예상대로였다. 일주일 간 서로 ‘간 보기’를 한 덕분에 대화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취업이 안돼 힘들다는 얘기 따위는 꺼내지 않았다. 여행한 곳, 좋아하는 음악 등 내가 자신 있는 이야기만 했다. 저녁을 먹고 집에 바래다주면서 손도 슬쩍 잡는 용기를 냈다. 처음 여자친구를 사귈 때처럼 짜릿했다.
그 후 다시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연락이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일 연애였다. 사실 마음에는 들었지만 연락하지 않은 것은 그날 감추었던 나의 실체를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다. 누군가를 만나서 취업에 끙끙대는 초라한 모습이나 적은 용돈에 밥값을 신경 쓰는 궁색한 내 처지를 굳이 보이고 싶지 않다. 연애나 결혼할 마음도 없는데 더 깊게 알 필요가 있을까? 만나기 전 찰나의 설렘과 상대방에게 매력적인 이성으로 비춰진 여운만으로 나는 충분했다. 곧 나는 다시 일주일짜리 연애감정을 살 수 있다.
그 여자의 속내(32세, 대기업 과장)
대학 때는 전성기였다. 늘 주변에서 소개팅 제안이 끊이지 않았다. 나가서도 매번 애프터 신청을 받았다. 그랬던 내가 서른이 넘었다. 이제 “주위에 누구 좋은 사람 없어?”라는 말이 버릇처럼 나온다. 주위에서는 눈을 낮추라고 타박이지만 눈을 낮추고 나 좋다는 사람 만나자니 세상에 아직 멋있는 사람이 한 트럭은 있을 것만 같다.
이성을 만날 때 조건을 따진다.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이 오래갈까? 무난한 성격에 소위 말하는 명문대 출신, 재벌까진 아니어도 넉넉한 집안형편 이 삼박자만 갖춰지면 된다. 능력 좋은 남자 만나서 팔자 필 생각 아니냐고? 글쎄, 그러면 좋은 거 아닌가? 굳이 삐뚤어진 성격에 어려운 집안형편의 남자와 지지고 볶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
친구들이 웃으면서 얘기한 소셜 데이트 앱에 남몰래 가입했다. 지인에게 구차하게 부탁하느니 알아서 해결하고 싶다. 잘 나온 사진을 올리고 프로필에는 취미로 플루트와 테니스를 올렸다.
‘31세 남성, 명문대 졸업, 유학 후 금융권 종사, 강남 거주.’ 선호하는 조건을 갖춘 프로필이 떴다. 반듯한 외모에 조건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일단 데이트 신청을 수락했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짧게 인사하고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틈틈이 그의 동향을 살폈다. SNS계정에 직장동료와의 회식사진, 테니스 치는 모습 등으로 그의 사진이 종종 바뀌었다. 나도 그를 의식해 예쁘게 나온 사진이나 여행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을 일부러 올렸다.
기대에 들뜬 시간이 지나고 그를 만났다. 날씨와 동네 이야기부터 시작한 대화는 지루했다. 서로 공유하는 지인이나 관심사도 없고, 이상형이나 집안사정, 직장 등 사생활을 묻자니 나를 조건 따지는 여성으로 볼 것 같았다. 그날 확인한 건 그의 평범한 외모와 부족한 유머감각뿐이었다. 이틀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테니스를 같이 치자고 했다. 활동성 있는 여성으로 보이려고 올렸던 ‘테니스’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보다. 대학 때 배운 실력으로 테니스장에 섰다. 그는 이날도 부족한 유머감각을 테니스 실력으로 채우려 했다. 우리는 그 후 두 번을 더 만나 테니스를 쳤다. 나는 아직도 그가 유학을 언제 다녀왔는지, 형제가 몇 명이고 집안사정이 어떤지 모른다. 그의 조건을 알아내려면 테니스를 얼마나 더 쳐야 되는 걸까. 그는 아직도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한 게임 하시는 거 어때요?’라며 상냥한 문자를 보낸다. 이 남자, 앱으로 테니스 연습상대를 찾은 모양이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임준섭기자 ljscoggg@hk.co.kr
김명선 인턴기자(고려대 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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