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이야기하자면 삼형제의 이야기를 또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서승, 서준식, 서경식. 아버지는 일본으로 돈 벌러 온 할아버지를 따라왔다가 해방이 되고도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았고 세 형제는 일본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느낀 것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였다. 그럴 때마다 형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생각하면서 고국을 그리워했다. 마침내 둘째 준식이 1967년, 첫째 승이 1968년 고국으로 유학을 했다. 고국과 민족의 참모습을 보고 싶었던 형제는 그러나 어느 순간 간첩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 끝에 교도소에 갇히게 됐다. 당시의 고문이 어찌나 심했는지 형 승은 난로를 향해 몸을 던져 심한 화상까지 입었다.
전도양양한 두 아들이 꿈에서도 그리던 고국에서 옥에 갇히자 부모님은 한숨과 눈물로 지새다가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대학에 다니던 동생 경식은 부모의 한을 옆에서 지켜보는 한편으로 한국을 오가며 두 형을 옥바라지했다. 형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바라보면서 동생은 슬픔과 분노를 속으로 삭이며 민족, 국가 그리고 이산(離散)에 대해 생각했다. ‘난민과 국민 사이’는 서경식의 그 같은 사유와 성찰을 담은 책으로, 재일 한국인으로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모은 에세이와 평론이다.
그는 재일 한국인이 일본에서 아무런 권리와 의무가 없는 일종의 난민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 난민의 문제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국지전 등에서 비롯된 견딜 수 없는 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이 이산에 내몰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폭력과 대결이 난무한 20세기는 난민의 시대였다.
저자는 난민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허구성과 위험성에 가장 민감한 존재로 여긴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일본에서 일어난 노골적인 차별의 사례가 있고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사람들의 사연이 나온다. 거기에 재일 한국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더해지고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가 포개진다. 정치적ㆍ경제적 이유로 제 고향에서 뿌리 뽑혀 떠도는 디아스포라(이산)의 흔적이 있고 포스트 식민시대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저자의 단상도 들어있다. 뜨거운 주제이지만, 서경식의 쉽고 차분한 글은 공허한 큰소리보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2006년 봄 이 책이 한국에서 발간된 지 한 달이 채 안 돼 서울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도쿄경제대학 교수로 있던 그가 성공회대 연구교수 자격으로 한국 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책을 낼 당시 이미 한국 생활이 결정돼 있어서인지 ‘난민과 국민 사이’의 머리글에서 서경식은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찾아오리라고는 얼마 전까지 상상조차 못 했다”고 흥분된 기분을 적기도 했다. 자신과 가족에게 아픔을 준 조국이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소중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때 그는 기자에게 한국에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한국인의 사고와 생활 방식과 문화를 체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 그를 본 적이 없으니 그가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형 서승은 몇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유쾌하고 낙관적인 얼굴로 평화운동에 매진하던 서승을 보면서 동생 서경식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박광희 문화부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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