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나라는 1차 세계대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관심이 덜하지만 유럽에서는 낭만주의의 잔재를 일소하고 본격적인 20세기가 시작한 해로 크게 평가하는 분위기이다. 일례로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는 “1914~2014 근대성의 흡수”라는 야심찬 주제를 내걸기도 했다. 지리적, 시기적 차이를 묻지 않고 전 지구에 걸쳐 퍼져나간 근대성의 실상을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지난 세기와 근대성을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과거와는 다르다는 당대 인식과 미래를 향한 믿음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조직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20세기 정신의 핵심이었다. 과거와 끊임없이 대결한 20세기는 타고난 투사였다. 기존 제도와 관습에 반기를 든 아방가르드 예술, 혁명과 변혁을 꿈꾸며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정치운동은 미래를 향한 투신이었다. 혁명가뿐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과 개발을 통한 경제 성장에 매진한 이들도 미래를 추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법과 목표는 달랐을지언정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적 대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근대는 의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불과 십수년 전 우리는 시대를 세세히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근대, 근대, 탈근대, 현대, 포스트모던 등, 우리가 처한 시대가 과거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따져 물었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료타르 같은 이른바 탈근대 사상가들의 두껍고도 어려운 책이 몇 쇄를 거듭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우리는 근대가 도래했는지 아니면 지나쳤는지, 이들의 담론이 우리의 현실을 개혁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도래해야 할 미래가 있었기에 시대를 나누고 현재를 확인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역사가 끝났다는 어느 관변 학자의 진단에 코웃음을 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미래를 묻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2014년 사람들의 눈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해 있다. 현재의 문화계는 거대한 회고전에 몰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가 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20세기에 기대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다. 영화에서는 기존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후속편 아니면 프리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마저도 지난 세기의 컨텐츠를 CG로 구현하는 것이 태반이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클래식 음반산업은 어마어마한 물량의 시디 박스세트나 고가 엘피로 연명한 지 오래다. 물론 음원은 옛 거장들의 연주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패키지로 끊임없이 재발매되는 비틀즈를 비롯해, 대중음악과 재즈 역시 과거를 새롭게 포장하는 데 여념이 없다. 디자인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전국의 카페는 20세기 중반 미국과 북구 가구의 복각품이 평정했다. 심지어 남성 패션마저 클래식이 대세다.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감수성을 불러들이지 못하면 공연이든, 방송이든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들 정도다.
최근의 회고와 복고는 단순한 문화계의 유행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의 징후다. 디지털 기술혁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래가 현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 선지자 노릇을 한 미래학은 필요없는 학문이 되었다. 스마트폰만 최신형으로 바뀔 뿐 우리 삶을 규정하는 정치, 경제, 제도적 틀은 꿈쩍 않고 그대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바뀔 것 같지 않은 현재, 현재의 장기지속이다. 지젝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환경 오염과 재난으로 생태계가 붕괴될까 걱정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다른 세계를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이 고갈된 곳에서 미래의 청사진을 쉬이 그릴 수 없는 법이다. 역으로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문화 토양에서 정치 변화 역시 요원하다. 미래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 이럴 때 사회는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미래가 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미래를 되찾을 수 있을까.
박정현 건축평론가·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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