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 정치 풍자 코미디가 본격 시작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KBS 유머1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코너였다. 대기업 중역회의 장면을 배경으로 정치와 재벌을 풍자해 인기를 끌었다. 고(故) 김형곤씨는 회장 역을 맡아 “잘돼야 될 텐데” “잘 될 턱이 있나” 등의 대사를 유행시켰다. 로마시대 원로원을 배경으로 한 네로 25시, 서당을 무대로 시국을 비판한 탱자 가라사대도 인기 정치 풍자 코미디였다.
▦ 정권과 자본을 희화화한 프로그램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5공 때 시작한 ‘회장님…’은 권력 외압에 방영 시작 얼마 후 종영됐다가 87년 민주화 이후 다시 편성됐다. 재계로부터도 “코너를 없애지 않으면 후원을 끊겠다”는 압력에 시달렸다. 탱자 가라사대에 출연했던 개그맨 이성미씨는 “녹화를 하고도 방송에 못 나간 경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정치 풍자 개그의 수난은 요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를 남긴 KBS 개그콘서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세상’은 석연찮은 이유로 폐지됐다. 지난 대선 직후 방송된 개그콘서트의 ‘용감한 녀석들’은 “박근혜님 잘 들어…”라는 대사가 훈계조라며 제재를 받았다.
▦ 한동안 주춤했던 정치 풍자 개그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주 첫 선을 보인 개그콘서트 의 ‘닭치고’ 코너가 특히 화제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닭들이 모여 있는 고등학교가 배경이다. 캐릭터들은 자신이 얘기해놓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잊어버린다. 교실에는 ‘지난 일은 잊자’라는 교훈이 걸려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권을 풍자하는 듯도 하고, 세월호 참사 등 모든 것을 쉽게 잊는 세태를 꼬집는 것도 같다. 정치 풍자 대사는 한 마디도 없지만 대한민국의 망각증에 경종을 울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 정치 풍자 개그가 각광받는 이유는 현재 정치 상황과 무관치 않다. 정권의 ‘조기 레임덕’으로 외압이 줄어들 거라는 기대와 정치판이 개그 소재를 무한 제공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하지만 우려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소설가 이외수는 트위터에서 “닭치고 장수 여부가 표현의 자유 시금석”이라는 글을 올렸고 인터넷에는 “건승을 바란다”는 반응이 쏟아진다. 어쩌다 정치 풍자 개그의 존폐를 걱정하는 시대가 됐는지 씁쓸하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뉴스A/S▶칼럼 속 프로그램을 모르시는 분을 위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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