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자전적 내용 고스란히 담아
쇼윈도 부부의 삶 적나라하게 그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두 권의 일기를 쓴다. 한 권은 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토로한 진짜 일기, 다른 한 권은 어린 아내에 대한 집착과 의심으로 불타고 있는 남편에게 읽히기 위한 가짜 일기. 진짜 일기는 은행의 비밀금고 옆 작은 선반 위에서 파란 노트에, 가짜 일기는 자신의 박사논문 작업실에 놓아두는 빨간 노트에 쓴다. 아내의 일기를 훔쳐보는 남편과 남편이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내의 심리전. 도발적 도입부에서부터 반전의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강렬하고도 처연한 소설이다.
미국 여성작가 루이스 어드리크(60)의 ‘그림자밟기’는 화려한 쇼윈도 부부의 균열과 파탄을 잔인하리만치 섬세하고 대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사랑과 소유, 감춤과 드러냄의 관계를 묻는 심리소설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핏줄을 물려받은 혼혈 작가로 인디언의 역사와 정체성 문제를 주로 다뤄온 어드리크는 이 소설에서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견지하지만, 소설은 작가 자신의 실패한 결혼생활이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점에서 더 큰 화제를 모았다. 어드리크는 다트머스 대학에 다니던 1981년 이 학교 교수였던 작가 마이클 도리스와 결혼해 16년 만에 이혼했으며, 남편 도리스는 이후 알코올의존증에 걸려 자살을 기도한 바 있다. 작가는 2010년 이 소설을 내면서 “이 책을 쓰는 것 자체가 무척 두려웠다”며 “한발 물러서서 관조하는 한편 고집스럽게 집필을 이어감으로써 이야기를 객관화했다”고 고백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길과 아이린 부부는 모두 인디언 혈통으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부의 삶을 일궜다. 아내 아이린 아메리카의 초상화를 통해 ‘아메리카 연작’을 그려낸 길은 이제 비천한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남 보란 듯 성공한 화가가 되었고, 15년간 세 아이를 키우느라 뒤늦게 역사학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아내 아이린은 남편의 뮤즈로서 ‘고통 받는 한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겁탈당한 모습이나 팔다리가 잘리고, 천연두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 심지어 벌거벗긴 채 엉덩이 사이에 성조기가 끼워진 모습까지, 모델 아이린에게 신화적 이미지가 들씌워진 것.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다. “나는 캔버스에 비친 모습만 살아 있는, 죽은 여자다. …구경거리가 되는 고통으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가족 중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남자의 “절망적인 헌신”과 폭력의 반복은 서사에 팽팽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받고 싶은 선물을 묻는 남편에게 “당신이 떠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와 “아내와의 관계가 나빠질수록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편의 인연은 질기고도 질기다. 남편은 아내의 부재와 고통스러운 갈망으로부터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아내의 부정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아내가 시키면 심리상담도 받고, 정신과 의사도 만난다. “길은 다른 남자의 욕망 속에서 나를 원했어. 길은 경쟁하고 있었어. 다른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소유하고 싶었던 거야.”
길과 아이린 사이의 팽팽한 감정 전쟁은 거짓 일기를 통한 아이린의 계략이 성공하면서 끝내 길을 패배시킨다. 하지만 애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길이 파멸의 구렁텅이를 헤맬 때, 아이린의 절규는 목이 멘다. “제발 자살하지 말아요. 계속 살아요. 견뎌내요.” 소설의 극적인 반전과 함께 서사의 화자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구사한 둘째 딸 리엘이었음이 드러나는 마지막 장은 꽤 오래 저릿한 통증을 남긴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사랑은 비극이어라.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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