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36.5]내게 세금을 허하라

입력
2014.07.03 20:00
0 0

국민의 4대 의무 암기는 쉬운 듯 어려웠다. 달달 외웠건만 4지선다형 문제가 나오면 근로나 교육이 의무인지 헷갈렸고, 주관식이면 보통 납세(거부감 탓일까)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기발한 교사는 암기용 노래까지 만들어 학생들을 현혹했지만 그때뿐,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쓸모 없는 가락만 입안을 맴돌았다.

그래도 나는 암기 교육 덕분에 교육 국방 근로 납세 의무를 충실히 지키는 모범 국민으로 자랐다. 납세 기한을 엄수하기 위해 기꺼이 통장의 마이너스 잔고를 늘린다. 세금을 덜 걷어갔다며 쥐꼬리 월급에서 또 떼 가도 ‘나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한 셈 치자’고 마음을 다스린다. 무엇보다 의무를 다해야 권리도 생기는 법이니까.

반면 인터넷에 떠도는 이른바 상류층의 4대 의무는 참 외우기 쉽다. 위장전입, 면제, 상속, 포탈인데, 이 땅의 위정자와 고위 관료, 재력가들이 잊을만하면 일깨워준 공이 크다. 조금 멀게는 4대 의무를 솔선수범 완수한 전직 대통령이 있고, 최근에는 여러 장관 후보자들이 입길에 오른다.

억울해하거나 화낼 필요 없다.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고,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프랑스 정치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 법이니까.

올 2월 26일부터 100일간 임대소득 과세 방안이 누더기가 된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의 수준을 목도할 수 있다. 당초 정부 방침은 현행법상 과세 대상이지만 그간 주택 임대 현황을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납세 의무를 유보했던 임대소득에 앞으로 세금을 매기겠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이미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 원칙에 비춰 하등 문제 삼을 게 없었다. 아니 이제라도 조세 정의를 세웠으니 박수를 받을만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설계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1호 정책이라 기대도 컸다. 세입자의 월세 세액공제 확대라는 목적에도 눈길이 갔다.

하지만 즉각 소위 기득권층의 반발에 직면했다. 각종 논리와 통계 수치가 동원됐지만 “원래 안 냈으니 앞으로도 못 낸다” “부동산시장이 죽는다”는 게 핵심이었다. 여기에 일부 언론은 부동산시장을 망치는 모든 악의 근원이 임대소득 과세인양 몰아갔다.

“변경 불가”라던 관련 부처 장관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주택임대차시장 ‘선진화’ 방안은 두 번에 걸쳐 ‘후진’하더니 결국 멈춰 서버렸다. 임대소득 예외 없이 과세 원칙 천명(2월 26일)→2주택 과세 완화(3월 5일)→3주택 이상 과세 완화(6월 13일)로 세 부담을 확 낮춘 것도 모자라, 이번 정부 임기인 2017년까지 과세를 유보하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안 하겠다는 얘기다.

임대소득은 대표적인 불로소득이다. 세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정부가 방치한 결과, 임대소득을 신고하고 세금을 내는 집주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 비정상의 정상화마저 막힌 꼴이니 땀 흘려 벌어들인 근로소득을 한 푼 에누리없이 원천징수 당하는 월급쟁이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이로써 상류층의 4대 의무 중 하나인 포탈은 정부의 공식 면죄부를 받았다. 법을 어기고 세금을 안 낸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주고, 안되면 여론을 등에 업고 악다구니를 쓰라는 방법까지 일러줬으니 누가 법을 지키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 할까. “법을 지키면 바보”라는 통념을, 세상은 약자보다 부자 편임을 정부 스스로 인증한 꼴이다.

부동산시장을 살리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살리고 싶어하는 열망도 알겠다. 살려야 하는 당위도 있다. 그러나 임대소득 과세만 미루면 부동산이 벌떡 살아나리라는 기대는 미몽에 불과하다. 이 정부 들어 부동산시장이 주기적으로 거래절벽 현상에 시달린 건 원칙 천명보다 오락가락 정책 ‘혼선’과 ‘불신’ 탓이 크다.

사실 나는 집이 두 채다. 월세도 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따지면 임대소득 과세 유보를 반겨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칙과 신뢰’라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이번에는 부디 지켜지길 바란다.

과세가 원칙이라면 나는 기꺼이 세금을 내겠다, 경제적 오판과 집값 하락으로 집 한 채를 처분하지 못해 다달이 빚을 갚는 버거운 형편이지만. 언제까지 교과서와 현실은 정반대라고 아이들에게 부끄럽게 고백할 것인가. 국회 입법 과정을 지켜보겠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