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2030 세상보기] 절망과 치열함 그리고 평화

입력
2014.07.02 20:00
0 0

꽃별 해금연주자

고등학교 시절 가장 연습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 때는 ‘일등 해야지’ 하는 너무나 명료한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려웠다. 내 앞에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 너무 싫었고, 아차 해서 두 명이 되면 앞이 캄캄했다.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다. 고3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연습실에서 연습하다 줄이 끊어져서 줄을 바꾸다가 칼에 손이 베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독하게 연습하더니 손에서 피까지 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열심히 한다는 게 뭔지 그때 알았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내 안에는 나, 해금, 그리고 최고가 되는 것, 그 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재수를 하게 되었다. 국악고등학교에서 그 해 재수를 한 건 두 명 뿐이다. 나는 그 두 낙오자 중 하나였고, 그 실패는 그 동안 열심히 해온 나의 시간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때까지 큰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당장 해금이 하기 싫어졌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대학에 떨어진 건 해금할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원망하는 마음이 하늘을 찔렀다. 한 일주일 두 가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왜 떨어졌을까?’, 그리고 ‘이젠 뭘 하지?’그렇게 마음을 못 잡고 힘들어하던 어느 날 새벽, 목이 말라서 나왔는데 소파에 누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엄마였다. 기도하고 계셨다. 그렇게 매일 아침 기도하고 있었을 엄마의 웅크림이 마음에 새겨졌다. 그래서 다시 해 보기로 했다.

재수하면서는 고3 때처럼 무조건 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하되 가끔 마음을 풀어주었다. 꽃이 피면 여행도 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 다니기도 했다. 책을 많이 읽고, 매일 일기를 썼다.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한 일 년을 살지도 않았지만,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 해 여름 생각이 난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연습을 하면 무릎 안쪽 골에 땀이 맺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몇 시간이고 앉아서 연습하다 땀이 흘러 내릴 때의 쾌감, 이건 느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즐거움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시험을 볼 때는 마음이 편안했다. 시험을 본다는 생각 보다는 존경하던 선생님들 앞에서 한번 연주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긴장되지 않고 기분이 좋았다. 그때 처음 담담하다는 기분을 알게 되었다. 늘 치열하고 뾰족하게 살았던 내가 조금씩 둥그레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금하는 것이, 이기고 일등 해야 하는 남과의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 연주를 즐기고, 들려줌으로서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재수하면서 스스로와 싸우고 남과의 경쟁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던 것이 오히려 나에게 음악 하는 행복감을 깨닫게 해준 것 아닐까 싶다. 가장 무서운 상대는 자기 자신이고, 음악은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끝까지 할 수 없으니까.

가끔씩 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때는 절망이라고 느꼈는데, 그 절망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아니었을 것 같다. 재수 하고 나서 내 동생이 그랬다. 언니가 변한 것 같다고. 그 전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고, 기필코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주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즐기고 있는 것 같다고.

살아가면서 늘 수많은 고비를 만난다. 고등학교와 재수의 시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게의 고비들이다. 그 고비와 위기들 앞에서 생각한다. 내가 성실하게 살아 있는 한 이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말이다. 치열한 순간을 보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치열함이 결국 나를 쓰러지지 않게 하는 힘이라는 걸. 그리고 절망을 겪지 않으면 그런 치열함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나는 최대한 여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또 치열해 질 것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 치열함에 가려 아무것도 즐기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치열하게 해 보지 않고서는 그것을 즐길 방도를 알 수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