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만큼 소비자가 관대한 나라도 없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른 모양이다. 국토교통부가 현대자동차 등에 대한 과징금 부과로 연비 부풀리기에 대한 논란이 일단락되면서 자동차 회사의 연비 뻥튀기에 대한 소비자 집단소송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번 연비 논란의 핵심 사안인 소비자 배상 대책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떠들썩하게 논란을 벌이고도 정작 소비자들이 연비 과장에 대해 직접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한 아무런 손해 배상이나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구제 장벽이 부처 간 장벽보다 더 높게 느껴진다면 문제해결의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엇박자의 정부도 문제지만 정작 이번 논란의 이해당사자인 현대차의 통 큰 제스처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은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포드자동차는 최근 링컨 MKZ하이브리 차량 등의 연비 과장 사실이 미국에서 밝혀지면서 국내에서도 해당 차량 구매자에게 경제적 보상을 현재 진행 중이다. 미국에선 자동차 회사들이 연비 과장 판정을 받으면 해당 차종을 구매한 모든 소비자에게 일괄 보상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현대차가 정부 부처간 다른 조사결과만을 탓하며 이의제기에 나서는 등 현재로선 자발적 보상안을 내놓을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은 ‘현대차 마니아’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임이 분명하다.
똑똑해진 소비자들이 자동차 선택 기준으로 꼽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연비다. 소비자들은 이번 연비논란 과정에서 정부 부처나 업체의 지루한 해명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해결책을 원한다. 따라서 글로벌기업 현대차가 이번 사안으로 받게 될 신뢰도의 영향은 사후대책 여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한민국 대표기업’으로서 시장에서 기존 위상을 지켜내기 위해선 보다 솔선수범하는 따듯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 고객을 보살핀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억울한 측면도 있겠지만 문제가 된 연비 논란에 대해 즉각적인 현대차의 사과와 보상이 이뤄질 경우 관대한 우리 소비자들로부터 얼마든지 실추된 위상을 회복할 수 있다. 집단 개인소송이 봇물을 이루고 법원 판결이 이뤄질 때까지 시간을 끈다면 그만큼 현대차의 입지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현대ㆍ기아차가 지난해 미국에서 유사한 사례로 90만명에게 4,200억원을 보상한 쓰라린 경험에 비춰봐도 무언가 통 큰 제스처를 먼저 취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대차가 이번 연비 부풀리기를 인정하고 직접 보상에 나설 경우 전 세계적으로 이에 대한 도미노 보상행렬이 이뤄질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대차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신뢰도 높은 프리미엄급 브랜드의 글로벌기업이 아닌가.
지난달 말 미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발표한‘세계에서 가장 평판 좋은 100대 기업(The World’s Most Reputable Companies)’에 국내 기업으론 삼성과 LG만이 포함됐다. 지난해 16위였던 삼성전자는 올해 마이크로소프트(MS)와 함께 공동 10위에 올랐고, LG는 64위를 기록했다. 자동차 업체로는 BMW와 다임러 벤츠가 각각 3, 8위에 올랐지만, 현대ㆍ기아차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는 극히 유감스럽지만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판과 신뢰란 단기적 관점이 아닌 장기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생겨난다. 한 심리학자는 좋고 나쁜 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기적 혹은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결정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의사결정은 단기적 혹은 장기적 이익 중 하나를 극대화하려는 동인을 가진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손해를 봐도 장기적 이익을 선택하는 것이 신뢰구축을 위해선 도움이 된다. 과거 갑작스러운 홍수 때문에 공사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황에서 임직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고령교 공사를 마무리한 고 아산 정주영 회장이 이후 관급공사를 싹쓸이한 것은 이 시점에 현대차가 정면교사해야 할 부분이다.
브랜드 신뢰도와 평판을 높이기 위해선 월드컵 경기장에 광고판을 거는 막대한 마케팅 투자도 필요하지만, 맞닥뜨린 위기상황에서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학만 산업부 선임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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