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 <11>잘 가라, 아니 잘 가지 말라
‘클레멘타인’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미국 민요 가운데 하나다. 한 소녀의 죽음을 말하는 가사가 부르기 쉬운 곡에 애조를 더한 이 노래는 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 끌어안을 만하다. “어느 깊은 골짜기, 동굴 집에”로 시작하는 영어 가사를 1930년대에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식으로 번안한 것은 소설가 박태원으로 알려져 있다. 원 가사에서 “금맥을 파는 광부와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 살았다”라는 뜻을 지닌 말은 번안가사에서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이 되었다. 이 철 모르는 딸은 “바람 불던 하루 날에 아버지를 찾으러 바닷가에 나가더니 해가 져도” 오지 않았다. 우리 세대는 이 번안가사로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과 만났다. 나와 내 친구들이 영어 가사를 익히려고 애쓴 것은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오 마이 달링 크레멘타인’을 2본 동시상영관에서 감독교사들의 눈을 피해 보고 난 다음의 일이다. ‘포티나이너(forty-niner)’가 1849년에 골드러시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던 광부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다.
영어 가사에서 클레멘타인이 “오리떼를 몰고 물가에 나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익사했다는 말은 골드러시시대 광산촌의 현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목가적이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동쪽 산록에 자리 잡은 바디는 19세기 후반에 잠시 흥왕했던 광산촌이다. 지금은 100여 채의 집이 쓰러지다 남아 있는 유령마을이지만 미국의 국립역사문화재로 지정되기 전부터 폐허를 명상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름난 순례지가 되었다. 모험가들과 절망의 끝에 몰린 사람들이 모여들어 날마다 살인이 벌어지던 이 험악한 땅으로 가족을 따라 이주해야 했던 한 소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굿바이 하느님, 나는 바디로 가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서부에 널리 알려져 이주민들의 삶을 요약하는 말이 되었다. 미국의 작가 수잔 페트론의 청소년소설 ‘가면들을 쓰고’(2012)도 이 소녀의 일기를 토대로 삼았다. 클레멘타인은 시기적으로 이 소녀의 이모뻘이 된다.
지금은 영어 가사로도 번안가사로도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어느 깊은 골짜기의 동굴 집도, 넓고 넓은 바닷가의 오막살이집도 사람들의 삶과 정서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못 다 핀 생명들의 죽음은 여전하다. 강사랑이란 가수가 ‘엄마 엄마 우리 엄마’라는 노래를 ‘클레멘타인’의 곡조에 얹어 부른 것은 내 기억에 2005년경이다(이 강사랑이 ‘굳세어라 금순아’와 ‘서귀포 70리’를 작사한 그 강사랑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세 절로 되어 있는 그 가사의 첫 절만을 적으면 이렇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나 떠나면 울지 마
뒷산에다 묻지 말고 앞산에다 묻어 주
눈이 오면 쓸어 주고 비가 오면 덮어 주
옛 친구가 찾아오면 나 본 듯이 반겨 주
지금 50대 중반을 넘긴 사람들은 이 가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같은 형식 같은 내용을 지닌 작가 불명의 시 한 편이 아주 오래 전에 나돌아 다녔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앞산에다 묻지 마
뒷산에도 묻지 말고 양지쪽에 묻어 주
비가 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 주
내 친구가 찾아 와도 나 죽었다 말하지 마
연원을 알 수 없는 시들이 늘 그렇듯이 이 시에도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는 말속에 못 다한 말을 담고 있다. 앞산과 뒷산에 묻지 말고 양지쪽에 묻어 달라는 말은 앞산 뒷산에 양지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땅에 묻히기가 그렇게도 두렵다는 뜻일 테고, 찾아오는 친구에게 제 죽음을 말하지 말라는 말은 지난날의 우정에서 영원히 따돌림을 당하기 싫다는 뜻일 테다.
이 슬픈 민중시는 특히 한국의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참 병장들은 전역일이 다가오면 ‘메모리’라고 부르는 추억 문집 같은 것을 만들어 제가 그렇게도 못살게 굴었던 후임 사병들에게 한 페이지씩 기억에 남을 말을 쓰게 했다. 만만한 것이 이 시였다. 아니, 꼭 만만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시가 문집에 보이지 않을 때는 전역할 사람이 그것을 제 손으로 써 넣기도 했다. 백혈병에 시달리던 소녀가 제 어머니에게 남긴 시라는 전설이 따라다니는 이 시를 군인들은 사랑했다. 이 사랑을 그들의 편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생명이 어이없는 죽음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그들의 마음 밑자리가 순진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험악한 병영생활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믿고 싶었는데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슬픔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거기에 원한이 섞여 있지 않아야 하겠지만, 세상의 모순과 갈등이 가장 날카롭게 드러나는 자리에 서 있기에 늘 상처를 받는 그들의 마음에 원한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슬픈 시는 감상적인 언어를 벗어나기 어렵고 그 슬픔은 늘 죽음에 이른다.
자신이 죽거든 어떤 일을 하지 말고 어떤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형식의 시는 이 ‘엄마 엄마’의 시보다 훨씬 더 연원이 깊다. 영국의 여성 시인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시집 ‘고블린 마켓’(1862)에 ‘노래’라는 소박한 제목의 시를 실었다. 전문을 우리말로 옮겨 적는다.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그대여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마오.
내 머리맡에 그대여 장미도
그늘진 사이프러스도 심지 마오.
푸른 풀이 나를 덮어
소나기와 이슬에 젖을진저,
기억하고 싶으면 기억하세요,
잊고 싶으면 잊으세요.
나는 어둠을 볼 수 없겠지요,
비를 느낄 수 없겠지요,
고통스러운 듯 울어대는
나이팅게일도 들을 수 없겠지요.
뜨지도 지지도 않는
어스름 빛 너머로 꿈꾸며,
어쩌면 나는 기억할 거예요,
어쩌면 나는 잊을 거예요.
이 시를 읊는 사람은 어린 소녀가 아니다. 벌써 청춘을 보내고 30줄에 들어선 여인이다.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스무 살 무렵에 두 번 결혼할 기회가 있었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으며, 세 번째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이미 결혼생활에 기대를 걸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평온하게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 시에서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가 명확한 선으로 구분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스름 빛’으로 옮긴 영어 ‘트와이라이트(twilight)’는 해가 뜰 무렵이라면 ‘여명’이고 해가 질 무렵이라면 ‘박명’이겠지만, 시인의 말대로 “뜨지도 지지도 않는” 빛이기에 단지 ‘어스름 빛’일 뿐이다. 이 ‘어스름 빛’은 그녀에게서 죽기 전의 삶과 죽은 후의 삶을 동시에 요약한다. 그녀에게는 삶에 기대하는 것이 없는 만큼 죽음에도 기대하는 것이 없었기에 그 슬픔에는 원한이 없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시의 말은 감상적인 언어를 넘어서서 관조적인 언어가 되었다.
혁명투사였던 시절의 박노해에게도 이 형식으로 쓰인 시가 한 편 있다. 시집 ‘참된 시작’(1993)에 실린 시 ‘그대 나 죽거든’의 첫 연만 적는다.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다
눈 내리면 언 땅에다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로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아영아영”은 시인에게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개인적 언어일 것이다. 시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치는 당부는 화장을 하지 말고 매장을 해달라는 말로 요약된다. 앞의 시에서 시인이 자신의 장례를 다른 장례와 구별하려 했던 데 비해 이 시는 오히려 전통적인 장례를 고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주검이 이미 다른 주검과 차별된 성질을 확보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검은 여타의 주검과 달리 무서운 “혁명가의 주검”이다. 시인 자신의 삶은 바로 이 무서운 주검을 만드는 일에 돌진할 것이다. 그런데 이 주검을 구별하기 위해 저 낯익은 형식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오히려 이 낯익은 형식이 말의 힘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시인이 시의 연을 바꾸면서 이 형식을 슬그머니 포기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지만, 그가 감상적이라고만 여겼던 그 형식에 격렬한 투쟁의 의지를 실어 자신의 시를 다른 시와 구별하려 했다는 점은 일단 확인해 둘 만하다.
그러나 슬픔이 없는 의지도 때로는 죄가 될 수 있다.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으면서 어린 학생들이 주가 된 300여 명의 생명이 다른 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그들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그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떤 말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인가. 이 처참한 죽음을 어떻게 다른 죽음과 구분할 것인가. 질문에 답이 없다. 함께 울자고 말할 수도 없고 편히 가라고 말할 수도 없다. 가슴에 묻자니 가슴이 좁고 하늘에 묻자니 하늘이 공허하다. 이 언어의 무능함과 마음의 무능함이 대낮에 두 눈을 뜨고 그 수많은 생명들을 잃어버린 한 나라의 무능함과 같다. 잘 가라, 아니 잘 가지 말라. 이렇게 쓰는 만사(輓詞)가 참으로 무능하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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