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부 장관
20세기 초 영국의 어느 시인은 실크로드를 ‘사마르칸트로 가는 황금길’이라고 표현했다. 유럽에서 동북아에 이르는 6,400여㎞의 장대한 교역로 실크로드를 떠올리며 시인은 유럽도 중국도 아닌 중앙아시아의 중요성을 노래했다. 중앙아시아는 그만큼 동서양이 만나 인류를 풍요롭게 한 상생과 융합의 땅이었다.
지금 세계는 다시 중앙아시아와 새로운 실크로드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은 카자흐스탄과의 2,200㎞ 송유관 연결, 투르크메니스탄과의 가스개발 및 1,800㎞ 가스관 건설 등 ‘신(新) 실크로드 경제권’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내년 1월 출범을 목표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로루시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 등 5개국 유라시아 경제연합(EEU) 형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은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연계한 ‘신 실크로드 전략’을 추진 중이다. 주요국들 모두 중앙아시아에 경쟁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우리는 작년 10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발표를 통해 유라시아 협력 확대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주 일주일간 이 전략의 핵심대상국들인 중앙아시아 3개국,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국빈 방문했다. 이들 3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평화의 대륙’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구상이 매우 시의적절하다며 적극 환영하고 있다. 특히 브레진스키가 ‘유라시아의 발칸’이라고 부를 정도로 과거 열강세력들의 지정학적ㆍ지경학적 갈등의 한복판에 위치한 이들 국가들은 문화적ㆍ역사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국을 모델로 한 국가발전에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순방국 정상들의 환대는 파격적이었다.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의전 관행을 깨고 직접 공항에 출영한 것은 물론 대부분의 일정에 우리 대통령을 동행, 안내했다. 이번 순방국의 한 지도자는 “한국을 위해서라면 어디서든 함께 싸울 수 있다”라며 각별한 유대감을 표시했다.
성과도 풍성했다. 우즈베키스탄 수르길 가스전, 가스화학플랜트 프로젝트, 카자흐 발하쉬 화력발전소 건설, 투르크 에탄크래커 공장건설 등 240억달러(24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대한 정상 차원의 협력을 확보했다. 나아가 318억달러(32조원) 상당의 수주 계약을 추가 체결했다. 일방적인 자원중심 외교를 넘어 태양광 발전, 정보통신기술(ICT), 섬유,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방안도 협의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를 제도화하는 장치도 중요하다. 카자흐스탄과의 일반사증면제협정 체결은 현지 진출한 우리 기업과 국민들의 오랜 숙원 사업으로, 작년 러시아와의 사증면제협정체결에 이어 또 하나의 획기적인 성과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을 위한 문화센터 건립에서 보듯 중앙아시아의 30만 고려인은 한국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높일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협력의지도 확인됐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핵을 포기하고 경제발전에 주력해 1992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 700달러에서 2013년 1만3,000달러로 성장한 카자흐스탄, 1993년 ‘중앙아 비핵지대 창설 협정’을 제안해 지난달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서명을 주도한 우즈베키스탄, 영세중립국이면서도 북핵 불용에 강한 목소리를 낸 투르크메니스탄 등 3개국은 그 자체로 북한에 주는 강력한 메시지다.
‘실크로드의 심장’이라 불리는 사마르칸트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란 뜻이다. 21세기 신 실크로드는 같은 꿈을 꾸는 유라시아인들이 모이는 길이 될 것이다.
이번 순방을 통해 필자는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는 하나된 유라시아 시대의 도래가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7세기 사마르칸트의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는 조우관을 쓴 고구려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이것이 상징하는 우리와 중앙아시아 간의 유구한 협력이 1,400년을 뛰어 넘은 오늘 상생의 유라시아 협력 모델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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