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온천으로 마실 간다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무작정 서울로 달려와 노래방에서 밤새 목을 풀었다. 한때 옷춤 새로 분내 풀풀 날리며 뭇 사내들 꽤나 울리던 그녀들이었건만 세상 풍파 만나 밀리고 쫓겨 촌부의 아내로 꽁꽁 숨어 산지 수십 년. 왕 언니가 무대에 선다는 말에 뱃속 깊이 가라앉았던 뜨거운 응어리가 목젖을 타고 올라온다. “나도 무대에 서고 싶다.” 그러나 행여 어미가 기생이었던 것을 알면 자식들이 등 돌릴까 무서워 목욕가방 하나 달랑 들고 밤차에 몸을 실었다. 이건 꿈이다. 아니, 죽기 전에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다. 그러니 몸이 의지를 배반한다 해도 내친 걸음 돌릴 생각은 없다.
부산 동래 예기(藝妓)의 마지막 계보를 잇던 유금선. 동래학춤 구음 보유자이기도 한 선생 공연에 ‘춤을 부르는 소리’라고 제목이 달렸다. ‘한 판 놀자’는 말인데, 때를 알 수 없는 예로부터 흐르는 장단에 절로 어깨를 들썩여 온 민족이니 분명 피가 동할 터. 말 반주로는 국보급인 전통기획자의 입이 술술 풀어내는 사연은 배꼽 빼는 만담이 되고, 주책스런 귀는 애달픈 구음에서 농염한 트로트까지 널뛰는 소리에 넋을 놓아버렸다. 언니와 함께 서는 무대, 정성스레 누르고 펴 곱게 단장해놓고 보니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 같다. 하지만 전 같지 않은 소리에 한번 놀라고 뜻과 달리 굼뜨게 움직이는 손놀림에 좌절했을지 모른다. 오매불망 그리던 무대, 이렇게 떨고 설레며 오른 할매들의 숨었던 내공은 녹이 한 꺼풀 벗겨지고 나서야 젓가락과 장구 사이를 현란하게 오가며 결국 눈이 호사에 겨워 춤추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하나씩 둘씩 별이 진다. 관절염으로 굽히지 못하던 무릎을 접어 보이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가슴 뛰게 하고 손짓 하나 만으로도 무대를 가득 채우던 진주 검무 예능 보유자 김수악 선생이 갔다. 동래야류 보유자 문장원 선생의 입춤은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무형문화재 한량무 보유자 김덕명 선생은 진작 아흔 줄에 들었다. 예기였던 어머니의 과거와 화해하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이듬해 떠난 아들을 가슴에 품은 채 프랑스 극장에 떠돌던 혼을 달래 하늘로 보내던 장금도 선생. 한창 때 장안 한량들이 앞다퉈 보낸 마차꾼을 줄 서 기다리게 했던 민살풀이는 손끝에만 남았고 머리에는 쓸어보고 덮어보아도 소복한 눈이 계속 쌓인다.
유금선 선생의 무대를 다시 찾았다. 불과 2년새. 아뿔싸, 그녀의 시계바늘이 이렇게 빨리 돌았을 줄이야. 이번에는 말 반주에 이어 글 장단까지 얹은 제목 ‘해어화(解語花)’, ‘말하는 꽃’이라. 견줄 이 없는 미인, 당(唐) 현종이 양귀비를 그리 빗대었고 화류계 여인을 이르기도 했다는데… 선생은 노래 한 소절 후 두 마디 숨 몰아 쉬고, 이 절은 마다한다. 그리고 더 얇아진 어깨를 가늘게 들썩이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짧은 앙코르 곡을 끝으로 무대 뒤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왜 굳이 “유 선생을 휠체어에 태워 무대로 모셨냐”고, 왜 “장선생이 늘 하던 먹물 염색을 말렸냐”고 묻고 싶지 않다. 감칠맛 나는 소리와 애끓는 몸짓이 박혀있던 가슴을 치며 너나없이 울게 만들었으니까.
‘민속을 값싸게 취급’하는 외국공연 관계자들에게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는 모두 현대예술”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안다. 나도 고만고만한 남의 민속에 굳이 돈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아무리 우겨도 그들이 사가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결국 현대적 옷을 입히고서야 장사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그러나 기억하자. 드물게 단전에 기 모아 좌중을 휘어잡고 놀던 진짜 고수들과 벼 베낸 논에서 함께 춤추고 바닷가에서 용왕 굿을 보고 난 영국 저널리스트의 “오늘 이후 내가 무용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던 고백을.
시계는 멈추지 않고 박물관에 흔적으로만 남을지 모를 우리 문화가 선생들과 함께 역사책 귀퉁이로 사라진다. 과거 없이 현재도 없는 것을, 잡아두고 싶지만 좋아진 기술 덕에 기록필름 하나 있을 뿐 제자를 길러내지 못해 볼 낯 없는 스승을 만나러 끝내 그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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