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윤 시사평론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8월 방한 일정이 정해졌다. 지난 18일 로마교황청과 한국천주교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교황은 8월 14일 도착해 4박5일 머무는 동안 청와대를 방문하고 각종 천주교 행사 집전 후 한반도평화 메시지를 발표할 예정이다.
억압받고 소외당한 자들을 위한 교황의 파격 행보에 전 세계인들이 감동하는 것은 그간 종교지도자들이 화려한 법복 속에서 권위주의적 모습으로 세상과 유리돼 왔다는 점을 보여주는 역설이다. 지난 대선 이후 이 땅에는 민주와 반민주, 정상과 비정상, 원칙과 반칙, 소통과 불통의 대립이 1년 반 째 지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불의를 불의라 지적하며 억눌린 자들의 곁을 지켰다. 일부는 수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교황이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할지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그는 교회의 세속화를 일관되게 경계했고, 재난 현장에 맨 발로 뛰어가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로했으며, 착취적 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교황의 일정이 발표되자 세월호 유가족대책위원회 유경근 대변인은 일단의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의 글 일부다. “8월 15일 미사에 세월호 유가족도 초청한다는데, 대책위가 아니라 유가족 중 신자 몇 사람의 개인 자격 초청이라고 한다. 그렇게라도 불러주시는 게 감사하지만, 왜 굳이 신자로 제한하는지 궁금하다. 교황청 뜻인지, 한국측 결정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분위기 상 만나는 건 못 막겠고, 그 파장이라도 줄여보겠다는 판단인지 모르겠다. 특별대우를 해달라는 게 아니다. 익히 들어온 교황님의 모습과 너무 다른 것 같다.”
유 대변인 추측대로 어느 쪽 의사에 따라 그런 결정이 내려졌는지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특정 종교 내의 의사결정을 두고 이러니 저러니 시비 삼을 일이 아니기도 하다. 다만 그런 결정이 내려진 배경에 천주교계 일각의 우려대로 서울대교구의 보수적 시각이 힘을 발휘했다면 씁쓸하다. 신자 여부를 차별하는 게 예수와 교황의 뜻인지 묻고 싶다. 천주교의 위계질서는 특별히 엄격하다고 들었다. 그런 분위기 상 ‘높은 몇 분들’이 내린 결정에 이의를 달기 어려우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혹시라도 교황이나 예수 옆에 바짝 붙어 ‘문고리 권력’을 행사하는 분들은 없는지, 면전에서는 교황께 존경을 표하지만 실제로는 예전 그대로인 분들은 없는지, 만약 있다면 예수께서 뭐라 말씀하실지 궁금하다. 교황 혼자서만 개혁과 탈권위, “민중 속으로!”를 외치면 뭐하겠는가.
듣자 하니 한국천주교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주교단 회의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울대교구의 의중이 더 강력하다고 한다. 바티칸에 보내는 한국천주교 성금 중 서울대교구 몫이 가장 크고 신자 수도 많아 서울대교구가 곧 한국천주교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교구가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보수성이 강화됐다는 게 평신도협의회 등의 의견이다. 일례로 사제들의 시국성명이 이어지던 지난 겨울 타 교구 사제들은 모두 기명으로 발표했지만 유독 서울대교구만 무기명이었는데, 교구 내 보수성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특정 교구의 보수화 여부를 외부인이 시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동선과 접견대상을 정하는 과정에 특정 교구의 ‘힘’이 작용했다면 일종의 ‘완장’이 연상된다. 교황은 특정 교구만의 교황이 아니잖는가.
교황이 한국을 한번 찾는다고 해서 우리 문제들이 한꺼번에 풀리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권위주의적 높은 분’이 아니라 절로 우러나서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어른’이 드문 현실에서 현 교황은 특별한 지위와 의미를 차지한다. 그의 메시지를 통해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모색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손님 맞을 때 누추한 것보다 밝고 깨끗한 면을 보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심사다. 그러나 치부를 화려한 보자기로 덮는다 한들 치부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혹시라도 교황의 시선이 머물 곳곳에 화려한 보자기를 덮으려 애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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