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은 대체로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아무리 좋은 것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나쁜 점을 몇 가지는 갖고 있기 마련이고, 나쁘게 보이기만 하는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좋은 일만 겹쳐서 일어나면 괜스레 불안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좋은 일에는 흔히 마(魔)가 들기 쉽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말도 실은 우리가 이미 본능적으로 세상사의 이중성을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요즘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면서 민주주의에도 두 얼굴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교회 강연이 특별히 문제인가 보다. “그래, 한두 군데 적절치 못한 표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엔 문제없잖아. 스스로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민주주의 아냐?” 총리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요구하는 거리의 부정적 반응에 대한 일부 보수적 정치인들의 반박이다.
우린 여기서 총리 후보자의 발언과 자질을 분석하고 평가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개인적으로 보면 그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닌데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고, 지명되자마자 스스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과거의 글과 강연들이 샅샅이 까발려지고, 본인의 진심은 헤아리지도 않고 몇몇 구절을 확대하여 친일파로 몰아가는 ‘여론’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여론의 두 얼굴이다.
‘여론’(public opinion)은 글자 그대로 ‘공중의 의견’이다. 여론과는 달리 ‘의견’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의견은 쉽게 조작될 수 있는 민중의 생각을 의미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지성인들의 의견과는 달리 민중의 의견은 불확실하고 증명되지 않은 판단이기 때문에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는 엘리트와 민중을 구별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선거에서 평등한 한 표를 행사한다. 이러한 민주적 평등주의는 우리 모두가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투표 행위를 제외하고는 사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정치적으로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내가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면 불교 신자이든 함께 살아가는데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설령 우리 민족이 겪은 어떤 사건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사적인 의견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양심도 알기 어려운데, 신의 뜻을 감히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그가 공중의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의견에 대한 의견을 가지게 될 때 사적인 의견은 졸지에 공적인 의견이 된다. 우리는 이런 의견을 ‘평판’이라 부른다. 언어와 행위로써 공적인 문제에 참여하는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통해 비평받을 때 그것은 정치적이 된다. 그것은 가정 내의 행위일 수도 있고, 친지들 사이에서 오프더레코드로 말한 발언일 수도 있고, 교회에서 행한 강연일 수도 있다. 거리의 사람들이 공적인 관심에서 그 의견에 토를 달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시작하면 비로소 ‘여론’이 형성된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힘을 갖고 있지 않은 거리의 사람들이 가진 유일한 정치적 힘이 바로 논쟁을 통해 형성되는 여론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판단력을 독점할 수 없다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중’만이 이성적이라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득권 정치세력은 이런 여론을 항상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정권을 잡기 위해 공중의 지지를 얻고자 할 때는 여론을 장악하려는 경향을 보이다가 여론이 등을 돌리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갑자기 민주적 절차를 강조하기 시작한다. 공중을 배제하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일까? 여론을 주도하기 위해 글을 써왔던 언론이 여론의 제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적인 의견과 공적인 평판이 교차하는 여론의 두 얼굴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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