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갈등 이대로 괜찮나
이 "사회통합 저해수준 가기전 제도적 해결"
박 "공동체의 원칙 정립 안돼 갈등상황 반복"
박근혜정부 평가
이 "대통령이 소통,경청하려는 자세 부족"
박 "시민사회와 조율 맡는 조직 취약한 듯"
우리 사회의 복잡한 갈등구조를 통합으로 이끄는 실천적 해법은 ‘소통과 포용, 양보’라는 진단이 나왔다. 창간 60주년을 맞은 한국일보가 ‘갈등넘어 통합으로’라는 주제로 진행한 지상 대토론의 마무리 토론에 나선 보수와 진보의 최고 정책 브레인들이 내놓은 해법이다.
참여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64) 경북대 교수(경제통상학부)와 이명박정부에서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한 박재완(59)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지상 대토론 마무리 세션인 ‘통합으로 가는 길’ 좌담회에서 사회적 대화기구 및 내각책임제, 오픈프라이머리 등 갈등 해법의 다양한 기제를 제시했다. 토론회는 20일 한국일보사에서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과)의 사회로 진행됐다.
두 전문가는 우리 사회 갈등 해소의 과제로 공히 소통과 포용, 양보를 제시했다. 이 교수는 “위정자나 우리 사회 강자들이 좀 더 열린 제세로 경청 소통, 포용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고 박 이사장은 “(진보나 보수) 양쪽이 명분에 집착하기 보다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이사장은 그러면서 “한 발 물러나 타협을 하려는 모양새를 취할 때 이를 정의롭지 못한 후퇴로 비하하는 분위기가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두 전문가는 또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갈등 요소로 이념 내지는 정치갈등을 꼽으면서 다양한 해법을 제시했다. 정치분야의 구체적 과제로 이 교수는 노사정위원회의 활성화 및 비례대표 확대, 대선거구제 실시 등을 제안했고 박 이사장은 오픈프라이머리제 및 내각책임제 도입을 주장했다. 또 이 교수는 참여정부에서 가동했던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시민사회수석실’의 순기능을 강조했고 박 이사장은 이명박정부에서 중도노선에서 추진했던 ‘동반성장 녹색성장’프로젝트가 상당한 성과를 도출했다고 설명했다.
●사회갈등의 현주소
김호기 교수(사회자)= 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만, 우리 현실에선 계급ㆍ지역ㆍ이념ㆍ세대 등 여러 갈등이 사회발전의 발목을 잡는 건 아닌지 우려를 갖게 한다. 우선 우리 사회의 갈등을 어떻게 보나.
이정우= 다른 나라에 비해 유달리 갈등 상황이 많고, 한번 발생하면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양상이 잦다. 갈등 요소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미연에 예방이 안되니까 폭발 수준으로 가면서 국민적 쟁점으로 비화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김 교수가 말했듯이 갈등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독재시대에는 권력으로 억누르다 보니 갈등 표출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민주시대다. 갈등은 표출되는 게 맞다. 다만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수준으로 가기 전에 제도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게 바람직하다.
박재완= 전세계적으로도 통합보다는 분열이나 갈등이 심화하는 상황이다. EU에선 정치 기조가 자국 이기주의로 흐르는 것 같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에선 ‘두 개의 미국’이라는 말이 나온 지 20여년이 지났다. 얼마 전에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움직임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되겠지만 ‘자스민 혁명’도 있었다.
우리는 선진국 진입과정에서 ‘게임의 규칙’이나 ‘공동체의 원칙’이 아직 정립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저축은행 사태만 해도 피해자들은 정부에 높은 수준의 배상을 요구하고 국회의원들은 표를 감안해 특별법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정부가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다행히 정리가 잘 됐지만,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도 짚어봐야 한다. 서로 입장이 다를 때는 한발씩 물러서서 절충하거나 타협을 해야 하는데 이를 정의롭지 못한 후퇴로, 일종의 악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이정우= ‘월가를 점령하라’ 얘기를 했는데, 최근 피케티의 책을 보니까 21세기가 ‘세습자본주의’로 가면서 불평등 양상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화할 것이라고 암울하게 전망했더라. 사실 전 세계적으로 불만이나 박탈감이 상당한 것 같다. 그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월가 점령 시위로 표출된 거다. 한국도 이런 상황의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중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매도 당하는 분위기나 문화가 있다는 데 일정 부분 공감한다. 해방 직후에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는 중도 좌나 중도 우가 있었지만, 결국은 남북 모두에서 극우와 극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이후로는 대화를 통한 갈등 해결이 어려운 정치풍토가 고착화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갈등은
사회자= 앞서 여섯 차례에 걸쳐 이념ㆍ정치ㆍ역사ㆍ노사ㆍ세대ㆍ대북갈등을 살펴봤는데, 어느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나.
박재완= 이념갈등 또는 정치갈등이 권력투쟁 과정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양상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인위적으로 부풀려지는 양상을 띤다. 예를 들면 한ㆍEU FTA와 한미 FTA는 파급 효과가 비슷한데도 이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전혀 달랐다. 미국과 EU라는 상대국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투영된 것 아닌가 싶다. 사실상 반미(反美)감정으로 표출된 세계관이나 가치관, 이념 등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이분법을 통해 피아를 나누고 국민들에게 이를 강요하는 건 정치권의 고질적인 병폐다.
이정우= 가장 심각한 뿌리는 이념갈등이라고 본다. 해방 직후부터 우리 나라를 완전히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갔고, 결국은 전쟁으로까지 비화하면서 100만명 넘는 사람들이 희생됐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국가권력과 정치권은 좌우 이념갈등을 활용해왔다. 역사교과서 논란도 좌우 대립이 핵심이고, 세대갈등이나 대북갈등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좌우 이념 대립이다.
물론 지금은 해방 직후나 한국전쟁 때와 달리 논쟁과 토론으로 바뀌었다. 따지고 보면 성장이냐 분배냐, 시장이냐 국가냐 등의 점잖은 논쟁도 결국은 그 뿌리에 좌우 대립,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갈등 관리
사회자= 박근혜정부의 갈등 관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박재완= 시민사회와의 의견 조율이 다소 부족한 듯하다. 거버넌스 측면에서 그 쪽을 맡고 있는 조직이 좀 취약한 것 같다. 이명박정부 때는 특임장관실이 있어서 시민단체와 의견을 조율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전임 정부 때의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실 기능이 총리실로 이관되면서 기능이 좀 약화한 듯하다.
이정우= 사실 가장 중요한 건 대통령의 소통하고 경청하려는 자세인데 그런 점이 부족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유가족들이 KBS 항의방문을 갔다가 청와대까지 갔는데, 평소 같으면 대통령이 굳이 만날 필요가 없었겠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는데도 결국은 정무수석을 내보냈다. ‘저건 아닌데, 유가족들을 청와대 안으로 들여서 얘기를 듣는 게 좋았을 텐데’ 싶어 안타까웠다. 대통령의 이런 자세가 전반적으로 청와대를 비롯한 권력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신호를 준다. 지금 정부는 경청하고 소통하려는 자세가 많이 부족한데, 남은 임기 중에도 이 문제가 계속 논란이 될 것 같다.
박재완= 박 대통령이 담화 발표 전에 유가족 대표를 청와대로 초청해서 얘기를 듣는 자리를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일국의 대통령인데 아무 사전 협의도 없이 불쑥 찾아가고 이를 용인해서 만나는 선례를 남기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정우=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진도에서 약속한 것도 있고, 그런데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게다가 KBS 고위 관계자가 실언을 해놓고 사과조차 하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분노한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간 것이다. 그러면 예외적으로라도 만나서 얘기를 들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바쁘면 ‘오래 들어주긴 어렵다’고 직접 양해를 구하는 그런 모습이 아쉽다는 것이다.
●밀양송전탑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사회자= 예를 들어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은 어떻게 푸는 게 바람직한가.
박재완= 송전탑 사례의 경우 밀양지역만 생각하면 지하화하지 못할 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국 20여 곳을 모두 지하화해야 하는데, 당장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 정책 창구격인 해당 부처 관계자들이, 필요하다면 장관이 직접 나서서 양해를 구하고 설명해야 한다. ‘주민들이 아무리 반대하고 떼를 써도 안 되는 게 있구나’ 하는 선례를 남길 수 있어야 하고 이런 과정이 축적돼야 한다.
이정우= 밀양 송전탑 문제는 10년 정도 됐다. 개인적으로는 저압 송전도 가능한데 765K볼트인 고압송전탑이 꼭 그 곳을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다. 다른 지역은 조용한데 밀양만 시끄럽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다른 지역은 사람이 안 살지만 이 곳은 인근 수십 미터 안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송전선이 지나가면 결국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원전에 대한 발상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이 원전을 포기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재생가능에너지를 현실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우리도 원전 의존도를 낮추고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
박재완= 독일이 원전을 포기한 것은 주변국으로부터 전기를 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비용 측면에서 원전이 저렴하다. 사후처리 비용이나 사전 갈등 비용 등을 살펴보긴 해야 하지만, 현재로선 국민 부담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좁은 국토에서 차선책 정도로 보는 것이다.
●거버넌스(정책수렴기구)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
사회자= 우리 사회에서 갈등 해소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박재완=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전문가와 NGO가 중요한데, 아직까지 전문가는 허약한 상황이고 NGO는 양쪽으로 나뉘어 편향돼 있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헤리티지재단 같은 권위 있고 역량 있는 민간 씽크탱크가 강화돼야 한다. ‘좋은정책포럼’이나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좋은 단초일 수 있다. 시민사회도 격정적으로 속도감 있게 의견을 내기보다는 차분하고 성숙하게 공론화 과정을 거쳐 다소 밋밋하더라도 정론에 가까운 의견을 내야 한다.
이정우= 역사적인 경험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선 국민들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해달라고 호소할 곳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 기댈 곳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화가 안되고 극단적인 상황으로 가는 경우가 생긴다. 역사적으로 위정자들의 소통 부족으로 인한 불신이 뿌리깊게 남아 있고,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그나마 좀 달라진 거고, 이 점에서 보면 겨우 걸음마 수준이다.
박재완= 노사갈등을 보면 우리는 제도가 유연하지 못하다 보니 해고나 퇴직이면 사실 갈 곳이 없다. 내가 고용노동부 장관 때 무급휴직이란 걸 만들었는데, 이 같은 제3의 완충막 역할을 할 제도가 곳곳에 도입되면 결사항전 식의 갈등은 없어질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이 아닌 중간 절충지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념갈등 해소 위해선 정치제도 개선 필수
사회자= 사실 정치가 갈등을 중재하는 게 아니라 부추기는 경우가 많은 건 제도상의 문제도 크지 않나 싶은데.
박재완= 왼쪽 정당이든 오른쪽 정당이든 자기 쪽 사람만 공천한다. 중간에 있는 사람은 낙천할 가능성이 크다. 여야 모두에서 온건 성향은 탈락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오픈 프라이머리가 필수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우리나라의 정당 현실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갈등을 줄이고 통합에 방점을 찍는다면 오픈 프라이머리에 주목해야 한다.
이정우= 비례대표를 늘리고 대선거구제로 가는 것 두 가지가 굉장히 시급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영ㆍ호남 몰표가 다소 개선됐지만, 여전히 다음 총선에서도 영ㆍ호남은 한 쪽 정당이 싹쓸이할 가능성이 높다. 독일처럼 절반인 150석을 비례대표로 하는 게 과하다면 100석 정도로 늘려 국민적 대표성을 높여야 한다. 대구 같으면 현재는 지역구 의원이 12명인데 대선거구로 해서 8명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면 2~3명은 야당이 될 수 있다. 호남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정부가 국가대개조를 논의할 때 전관예우 문제보다 더 시급한 게 선거제도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대화기구다. 이전에 공격을 많이 받긴 했지만 네덜란드 같은 노사정 대타협 모델로 가야 한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의 성공 모델이 있다. 우리의 경우 노사정위원회가 있긴 하지만 지금은 거의 개점휴업 상태다. 일단 박 대통령이 여기부터 힘을 실어줘야 한다.
박재완= 정부 형태도 검토가 필요하다. 대통령 중심제다 보니 거의 ‘전부 아니면 전무’다. 49%로 지고 나면 억울함 때문에 전의를 불태우고 그러다 보면 원만한 협조 대신 난관을 만들어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내각책임제 국가들의 경우 대체로 연정을 하고 있다. 대권에 모든 걸 걸고 전력투구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갈등을 줄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통합을 이뤄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과제
사회자= 사회통합을 이루지 않고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을 일궈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과제는 뭔가.
이정우= 정치도 중요하고 언론도 중요하고 학계도 반성해야 할 게 많다. 특히 위정자나 강자들의 자세를 강조하고 싶다. 이들이 좀 더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고 경청ㆍ소통ㆍ포용하려는 자세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다산 정약용이 노론에 밀려 곡산 부사로 내려갔는데 민란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라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곡산 인근에 왔을 때 민란의 주동자인 이계심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다산은 관아로 데려와 직접 얘기를 들어본 뒤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들자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풀어줬다. 이계심은 세금 폭등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가 괘씸죄에 걸렸던 건데, 다산의 파격적인 행보에 농민들이 마음을 열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정치인과 재벌과 언론인은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박재완= 모든 책임을 대통령이나 정부에게 돌리기 보다는 국민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쟁소가 우리처럼 많은 나라가 없다는데 사적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것도 중요하다. 다들 역지사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지도층의 영향력이 큰 만큼 그들이 솔선수범하는 건 기본 전제다.
정리=김현빈기자 hb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