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법칙을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과정이고, 가장 직접적이고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결과물의 일관성을 조정하는 것이다." <비넬리의 디자인 원칙>에서
1972년 뉴욕 지하철 노선도 90도ㆍ45도 각도로 단순함 강조 "실제 지리 반영 안돼" 논쟁 야기 결국 "모더니즘 정수" 재평가 받아
‘장식은 범죄’라는 논쟁적인 말을 남긴 건축가 아돌프 로스(1870~1933)는 ‘건축가는 숟가락 하나에서부터 한 도시까지 모두 디자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루하지 않은 아름다움과 함께, 그는 디자인이 구현해야 할 정직성ㆍ일관성을 중시했다. 그 생각은 건축가로서의 자부나 권능 못지않게, 디자인의 일상적 편재성(遍在性)을 전제한다. 책상 위의 잡다한 비품 배치에서부터 매일 골라 입는 옷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상의 모든 순간들은 디자인의 생산ㆍ소비 과정으로 치환될 수 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는 16살 때 이탈리아 밀라노의 건축가 카스틸리오니 밑에서 햇병아리 제도사로 일하며 로스의 저 교훈을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훗날 거장이 된 비넬리는 로스의 말에서 주어를 바꿨다. “만일 당신이 뭔가를 하나 디자인할 수 있다면, 당신은 모든 걸 디자인할 수 있다.” 물론 그의 말처럼, 누구나 디자인을 할 수 있고 뭐든 디자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디자이너가 되는 건 아니고,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란 더더욱 어렵다. 그는 엉터리 디자인으로 천박해져 가는 현대사회를 누구보다 경계했고, 그런 경향과 비타협적으로 싸웠다. 모더니즘 디자인 철학의 열정적인 전도사이자 구현자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가 5월 28일 숨졌다. 향년 83세.
대개의 열정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비넬리는 미적 독재자였다. 자신의 미학적 기준에 맞춰 세상 전체를 온전히 재편할 수 없는, 그래서 거슬리는 것들과 공존해야 하는 삶은, 마치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거북한 소음들을 견뎌야 할 때처럼 자주 불행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진부하고 찰나적인 것들을 경멸했다. “임시방편적인 요구, 새로움만을 추구하기 위해 정력과 돈을 낭비하는 일들을 혐오한다. 나는 시민의 요구를 충족하면서 영속될 디자인을 추구한다.” 그는 기능(function)과 패션(fashion)이 맞설 때면 서슴없이 기능을 앞세웠고, 자신이 추구한 기능적 아름다움이 공동체의 취향이나 습관과 맞설 때에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디자이너 생애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논쟁을 야기했고, 결국 가장 빛나는 업적 가운데 하나로 남은 1972년 뉴욕지하철 노선도가 대표적인 예다.
비넬리의 뉴욕 지하철노선도에 당시 시민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지상의 지리학적 진실들이 그의 노선도에서는 거의 전면적으로 부정됐다. 색으로 구분된 개별 노선들은 열병하는 군인들의 대오처럼 일사불란하게 90도와 45도의 정형화한 각도로 배열됐고, 시민들이 경험적으로 알던 수많은 역의 위치가 사뭇 다른 자리에 놓여졌다. 역과 역의 관계, 노선과 노선이 교차 병렬하는 이미지만을 추상한 그의 노선도에서, 지리적 노선도에 익숙했던 시민들은 당혹감 이전에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뉴요커의 자존심인 센트럴파크는 장방형의 실재와 달리 정사각형으로, 그것도 초록이 아닌 잿빛으로 묘사됐다. 허드슨 강의 색깔 역시 푸른색이 아니라 베이지였다. 자신이 도시의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또 지상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웠을 관광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베너티 페어’의 편집장으로 84년 퓰리처상을 탄 건축비평가 폴 골드버거는 “놀라울 만큼 산뜻하게 요약됐지만, 뉴욕이란 도시 자체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며 비넬리의 노선도를 비판했다.(뉴욕타임즈, 2008. 5.1)
당시 뉴욕 시민들은 지하철 역 하나하나의 추상화한 다이어그램 위에 지상의 다채로운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세월과 함께 쌓여 도시의 거대한 전설이 되리라 짐작할 수 없었다. 시민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버티던 뉴욕 메트로교통국(MTA)은 6년여 만인 1979년 비넬리의 노선도를 뜯어내고 실제 지리에 충실한 노선도로 돌아갔다. 새 노선도에는 지상의 지명들과 랜드마크, 근린공원 등이 표시됐다. 98년 노선도에는 버스와 페리 노선도까지 장황하게 담겼다.
그릇ㆍ책ㆍ달력... 세상을 디자인하다 기업 로고와 공원 브로슈어 등 그가 만든 다양한 작품들 40~50년 지나도 변함없이 사용
마시모 비넬리는 1931년 1월 10일 유럽 디자인의 수도로 꼽히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브레나 파인아트 아카데미와 밀라노 폴리테크닉대학을 거쳐 베니스대학에서 건축학 전공. 그는 동료 건축 디자이너였던 렐라 발레를 만나 57년 결혼했고, 세계적인 디자인회사인 유니마크 사에 취업, 65년 뉴욕 지부로 발령받아 미국으로 진출한다. 71년 유니마크사에 사표를 내고 아내 렐라와 함께 ‘비넬리 어소시에이트’라는 회사를 설립, 모던 토털 디자이너의 명성을 쌓아간다. 자립 배경과 관련 위키피디아에는 “회사의 마케팅 압박이 점점 강해지면서 자신의 디자인 비전이 점차 희석돼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으나, 비넬리가 공식적인 인터뷰나 글 어디에서도 밝힌 적은 없다.
지난 40여 년간 비넬리와 그의 동료들은 질레트 포드 블루밍데일 제록스 베네통 IBM 피렐리 올리베티 랭크 놀(Knoll) 헬러(Heller) 등과 일하며, 그릇 책 달력 가구 의류 기업CI 실내장식 건축 설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세계적 디자인 권위자인 데이비드 래스커는 “서구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은 하루 중 어느 순간엔가는 비넬리의 제품이나 디자인과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터, 2014.5.28) 사람들이 “디자인은 스타일”이라고 할 때 비넬리는 “디자인은 원칙”이라고 했다. “(디자인은) 법칙을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과정이고, 가장 직접적이고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고, 결과물의 일관성을 조정하는 것이다.”(비넬리의 디자인 원칙에서) 2012년 81살의 비넬리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기업 총수의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디자인 작업을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제품’이 아니라 세상을 디자인하고자 했고, 또 많은 것을 이뤘다. 디자인하길 원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작업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바티칸 CI(Corporate Identity)를 꼽았다. 실제로 그는 교황에게 “로고는 괜찮다. 하지만 나머지 모든 것은 바꾸자”고 제안했으나 교황이 수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7년 유니마크사 재직시절 그가 만든 아메리칸 에어라인(AA)의 로고, 맨해튼 백화점 체인 블루밍데일의 기업 로고와 ‘빅 브라운 백’(73년), 미국 국립공원 안내 브로슈어(77년) 등은 40, 50년씩 변함없이 쓰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이다. 친구이자 오랜 동료인 요시키 워터하우스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비넬리의 디자인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말에 “그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불멸성(timelessness)이었다”고 말했다.
비넬리가 뉴욕 지하철노선도를 디자인하면서, 영국 디자이너 해리 벡의 1933년 런던 지하철 다이어그램 노선도를 모델로 삼은 것도 그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즉 가변적인 도시 가운데 한 곳인 뉴욕의 단명할 수밖에 없는 시설 안내 지도를 디자인하면서 그는 당대 시민들의 즉각적인 요구보다는 영속적인 요구, 근간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게 추상이었고, 논리(Logic)였다. 센트럴파크의 중심부와 달리 서쪽에는 지하철역이 훨씬 적기 때문에 역의 간격을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그는 장방형의 공원을 정사각형으로 줄였다. 그는 공원의 모양보다 노선도의 논리를 중시했고, 뉴요커의 자존심보다 기능적 아름다움을 우선시했다. 그의 노선도는 지하철에서 사라졌지만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영구 컬렉션에 포함됐고, 적지 않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MoMA의 건축 디자인 수석 큐레이터인 파올라 안토넬리는 “뉴욕에서 우리가 지하철을 타는 순간, 우리는 ‘비넬리 랜드’의 시민이 된다”고 말했다. 2008년 남성잡지 ‘보그’는 비넬리에게 72년 노선도의 업그레이드 버전 500부를 한정 프린트해달라고 주문, 장당 299달러에 판매했다. 인근 노선의 색 구분까지 없애 더 단순화한 2008년 노선도는 전량 매진됐고, 보그는 판매수익금 전액을 뉴욕 사우스브롱크스 지역 환경운동가 그룹에 기부했다. 디자인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비넬리판 노선도의 부활을 요구하기도 했다.
2010년 뉴욕 메트로교통국은 비넬리에게 온라인용 노선도 디자인을 의뢰했고, 비넬리는 지리적 지도기반이 아닌 72년의 컨셉트, 즉 다이어그램 기반의 노선도를 전제로 그 의뢰에 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온라인 노선도는 더 단순 명료해졌지만, 마우스로 확대 축소가 가능하고 역 지상의 상세한 지리적 정보까지 열람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뉴욕타임즈는 비넬리의 말을 인용, 72년 노선도를 “컴퓨터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컴퓨터 시대의 노선도(Created in B.C(before computer) for the A.C(after computer) era)”라고 평하기도 했다.(2011.9.16)
모더니즘 디자인 철학의 전도사 이탈리아서 태어나 미국 이주 유행 아닌 영속적 미 추구 "그의 모국어는 디자인이었다"
비넬리는 정교한 스위스 기술의 상징적 서체로 통하는 헬베티카(Helvetica)의 전도사였다. 그는 생애 내내 자신의 모든 디자인 작업의 텍스트 폰트로 단 네 개의 서체(개러몬드, 보도니, 센추리익스팬디드, 헬베티카)만을 썼고, 특히 헬베티카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로고도, 뉴욕 지하철노선도도, 그의 유명한 달력인 ‘Max365’의 서체도 헬베티카였다. 2007년 헬베티카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영국 감독 개리 허스트윗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헬베티카’에서 비넬리는 “디자이너의 삶은 의사가 질병과 맞서듯이, 추함에 맞선 투쟁의 삶”이라고 말했다. 허스트윗은 “(비넬리와 같은 디자이너가 만드는 것은) 하나의 기업 로고나 브랜드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신문이나 잡지 영화나 방송에서 보고 읽는 모든 형태”라고 말했다.
“컴퓨터의 출현으로 소위 데스크톱 출판시대가 열렸다. 그 덕분에 누구나 주변에 있는 글자꼴로 자유롭게 타이핑을 하고 글자체를 변형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난잡한 미학의 재앙을 가져왔다.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화적 공해인 것이다. 늘 말하듯이, 데스크톱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의사였다면 우리는 벌써 다 죽었을지 모른다.”(비넬리의 디자인 원칙)
그는 2008년 자신의 디자인 작업 자료들을 모두 로체스터 기술연구소에 기증했고, 연구소는 비넬리와 그의 아내 렐라가 설계한 빌딩 일부를 할애해 ‘비넬리 디자인 연구센터’를 열었다. 2009년에는 자신이 평생 지켜온 디자인 원칙을 집약해 비넬리 원칙(Vignelli Canon)이란 전자책을 만들어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로 배포했고, 이듬해 확장판을 출간하기도 했다.(비넬리의 디자인 원칙(안그라픽스)은 그 책의 한국어판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기준에 맞게 좀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랐고, 저 모든 시도는 그가 선택한 추한 것들과의 싸움의 방편이었다.
지난 5월 지병인 심장병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던 때, 그의 아들 루카는 지인들을 통해 그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제안한다. 비넬리 생전에 마음을 전하자는 그 제안에 1,000여 통의 편지와 카드가 쇄도했다. 그 가운데 비넬리가 특히 기뻐한 편지는 20여 년 전 그가 한 그래픽디자인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국가적 재난’ ‘쓰레기 공장’이라고 비난했던 ‘에미그레(Emigre)’라는 그래픽디자인 회사 설립자의 편지였다. 그 설립자는 비록 디자인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긴 했지만 호된 비판 뒤에 담긴 정신에 감동했다며, “그 열정과 정직성, 비판과 찬사 모두에 경의를 표하며, 우리도 당신과 같은 열정을 유지할 수 있기만을 다만 바랄 뿐”이라고 썼다. 디자인 비평가 랄프 캐플란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비넬리는 몇몇 작품으로서보다 디자인 공동체에서 지속될 그의 영향력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비넬리에게) 영어는 제2외국어였지만, 어쩌면 이탈리아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모국어는 디자인이었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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