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 조폐창 가봤더니
위조지폐가 아니라면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5만원권의 고향은 경북 경산시의 조폐공사 화폐본부(조폐창), 정확히는 본부 내 은행권 제조공장이다. 위변조 방지요소를 대폭 강화한 신권 발행을 위해 2005년 1,300억원을 들여 설비된 이곳에서 현행 5,000원권(2006년), 1만원권과 1,000원권(2007년) 그리고 5만원권이 차례로 태어났다.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이달까지 생산된 5만원권은 9억장을 헤아린다.
5만원권 엄마는 귀하신 유럽제 기계
19일 언론에 공개된 은행권 제조공장은 각종 인쇄기계로 조합된 기다란 생산라인 2개를 갖추고 5만원권 제작에 한창이었다. 대당 100억원을 호가하는 독일ㆍ스위스산 인쇄기 사이 운반책은 무인 지게차. 총 8개 제작공정 중 5만원권 28장짜리 전지(全紙) 형태로 진행되는 7단계까지를 책임지는 이 전자동 ‘쌍둥이 라인’은 풀가동 시 하루 1,080만장의 은행권을 찍어낼 수 있다.
그렇다고 5만원권이 대번에 완성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충남 부여의 조폐공사 제지본부에서 공급받은 면 100% 백지가 5만원 지폐로 변신하기까진 장장 40~45일이 소요된다. 평판인쇄, 요판인쇄, 실크스크린인쇄 등 공정별로 인쇄방법이 각기 다르고 22가지에 이르는 위변조 방지기술이 차례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잉크 두께로 표면에 굴곡을 만드는 요판인쇄를 마친 뒤엔 4~5일 건조해야 지폐가 뒤틀리지 않는다.
여덟째 마지막 공정은 단재(마름질) 및 포장. 별도 공간에 설비를 갖춘 ‘커트팩(cut-pack)실’이 5만원권 분만실이다. 전지 다발을 가지런히 해서 자동 단재포장기에 삽입하는 작업은 사람과 5만원권이 살을 부비는 유일한 공정이다. 완성된 지폐는 1,000장 단위로 포장된 관봉 형태로 고유번호를 부여받고 한국은행에 운송된다.
김완종 인쇄생산관리처장은 “5만원권 생산을 시작한 뒤 손율(규격에 맞지 않아 파기하는 비율)을 현 수준인 5%대로 낮추기까지 1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홀로그램이나 은선이 종이에서 떨어지는 문제도 이런 시행착오 끝에 해결됐는데 덕분에 지난해 생산된 100달러 신권이 비슷한 곤란을 겪을 때 미국 당국에 “우리가 도와주겠다”고 제안하는 여유도 갖게 됐다. 미국은 자존심 때문인지 거절했다고.
5만원이 50환 될 뻔한 사연
5만원권은 1973년 6월 1만원권 이래 36년 만에 발행된 고액권이다. 화폐의 액면금액 대비 가치 하락을 들어 꾸준히 제기돼온 고액권 발행론에 총대를 메고 나선 이는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였다. 2002년 취임 직후 한은 내부에 '화폐제도 개혁 추진팀'을 발족시킨 그는 1년 간의 해외사례 조사 및 연구작업을 통해 ▦고품질 새 화폐 발행 ▦고액권 발행 ▦화폐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을 주장하는 대외비 보고서를 만든 뒤 노무현 당시 대통령 등 정책결정자들을 설득, 앞의 두 가지를 관철해냈다. 당시 대통령 직속 국가청렴위원회는 뇌물 거래, 비자금 조성 확대를 우려하며 고액권 발행에 반대했는데 지금 상황에 비춰보면 기우는 아니었던 셈이다.
자신의 화폐 개혁안이 미완으로 남은 걸 아쉬워한 박 전 총재는 2010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당시 화폐단위 변경안을 처음 공개했다. “화폐단위는 1,000원을 1환으로 하여 대미 환율을 대체로 1:1로 유지토록 한다. 보조화폐는 1환을 100전으로 한다. 고액권은 100환(10만원)권과 50환(5만원)권을 새로 발행하고 화폐도안 인물로는 100환권에 김구 선생, 50환권에 신사임당을 채택한다.” 5만원권은 액면금액이 두자릿수(50환)가 될 뻔한 운명을 모면했지만 김구 선생은 “10만원권까진 안된다”는 반대론에 밀려 자리를 잃었다.
울상 짓는 조폐공사
정작 조폐공사는 ‘맏아들’ 때문에 시름이 깊다. 5만원권 발행 이후 화폐 제조량이 급감하면서 경영 비상에 걸린 것. 마진율 높은 ‘효자’ 상품 10만원권 수표를 찾는 이들이 줄어든 건 ‘5만원권 쇼크’의 비근한 사례 중 하나다. 19일 만난 문승훈 조폐공사 사업처장과의 일문일답.
-타격이 어느 정도인가.
“은행권ㆍ주화를 비롯한 정부 발주 물량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70%에서 50% 아래로 떨어졌다.”
-공사 전체 매출액은 큰 변동 없더라. 오히려 지난해엔 창립 이래 최초로 4,000억원대 매출을 올렸고.
“상품권ㆍ신분증 제작 등 부대사업 덕에 매출은 선방했다. 한국거래소 금(金)시장 품질인증 업무로 버는 수수료 수입이 큰 몫을 했고, 지난해 치열한 입찰경쟁 끝에 페루와 100억원 규모의 은행권 수출 계약을 맺었다. 문제는 영업이익이다.(2009년 65억→2012년 -21억→2013년 29억원) 은행권이 고(高)마진율 상품이다보니 회복이 쉽지 않다.”
경산=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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