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
서울대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
공자가 주(周)나라에 갔을 때 사당의 섬돌 앞에 쇠로 주조한 금인(金人)이 있었다. 그 입을 세 번 봉하고 그 등에 “옛날에 말을 조심한 사람이다. 경계하여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실패가 많다. 일을 많이 만들지 말라. 일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라는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많은 조선의 문인들은 침묵의 미덕을 강조한 이 금인명(金人銘)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이 금인이 의(義)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비판다. “시골구석에 있는 서민도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될 일인데 임금이 금인을 만들어 모범으로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본받게 한다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리고 후진(後晉)의 손초(孫楚)라는 사람의 반금인명(反金人銘)을 소개했다. 쇠 대신 돌로 석인(石人)을 만들되 그 입을 크게 벌리게 하고 배 대신 그 가슴에다 “나는 옛날에 말을 많이 한 사람이다. 말을 적게 하지 말고 일을 적게 하지 말라. 말을 적게 하고 일을 적게 하면 후생들이 무엇을 서술할 수 있겠느냐”라고 썼다.
침묵이 개인의 명철보신(明哲保身)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국가와 사회에는 오히려 폐해가 될 수 있다. 19세기 역관(譯官) 출신의 문인 변종운(卞鍾運)은 ‘금인명의 뒤에 쓰다(題金人銘後)’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말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 번 나오면 천리마처럼 달려 따라잡을 수 없고 한 번 실수하면 그 잘못을 없앨 수 없다. 작은 것은 허물을 초래하고 큰 것은 나라를 잃게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이 주나라 사당의 금인을 보고 세 번 탄식했다. 그런데 금인의 입을 세 번 봉한 것은 말을 신중하게 하라는 뜻일 뿐이었지만, 입을 봉하지 않아야 할 때 입을 봉한 자들이 후세에 어찌 이리 많아졌는가? 더구나 묘당에 앉아서도 나라의 안위를 논하지 않고 대궐 앞에 서서도 임금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으니 이는 공경대부가 그 입을 봉한 것이요, 책선(責善)의 말이 벗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청의(淸議)가 사림에서 일어나지 않으니 이는 선비들이 그 입을 봉한 것이다. 감히 한번 말하는 자가 있으면 벌떼처럼 일어나 고함을 치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하니, 세상에 아부하여 구차하게 면하려고만 드는 일이 어느 새 습속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군자욕눌(君子欲訥ㆍ군자는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지 않고자 한다)을 핑계로 삼고 있으니 이 어찌 신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말이 아니면 펼쳐지지 않고 일은 말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략) 입이 없는 표주박은 원예사가 잘라 버리고,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대장장이가 녹여 없애는 법이다. 나는 수양산의 구리를 부어 금인을 만들되, 그 뺨을 넉넉하게 하고 그 혀를 붙여 넣어, 이로써 입을 봉하지 않아야 할 때 봉하는 자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게 하노라.”
입을 봉한 금인이 아닌, 입이 크게 벌리고 혀를 단 금인을 만들어 위정자의 곁에 둘 일이다. 이익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은 당시 ‘벙어리’라고 부르던, 입이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기물을 깨부수면서, “입이 있으면 울고 입이 있으면 말을 하는 것이 천하의 바른 도리인데, 입이 있으면서도 울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상리에 반하는 요물이다. 이 기물이 나오면서부터 위로 조정에서는 말할 만한 일도 말하지 않게 되고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게 되었으니, 이는 온 천하 사람들을 벙어리로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설화(舌禍)와 필화(筆禍)로 세상이 시끄럽다. 어쩌다 놀린 부드러운 혀와 붓이 세인의 귀와 눈을 거치면서 날카로운 칼과 창이 되어 스스로를 찌른다. 이 때문에 침묵을 명철보신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군자가 많아질까 걱정이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오히려 그 말을 가지고서 그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술자리에서도 그런 군자가 있으면 남들도 덩달아 입을 다물게 만들어 술판의 흥이 사라지게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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