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1인 통솔체제'로 대처
2007년 나폴리호 佛 해역서 사고
헬기 출동 선원 모두 구조 후
수심 낮은 英 항구까지 긴급 예인
화물·유류제거 작업까지 진행
빠른 의사결정 시스템 갖춘
선박구난관리대표부가 총괄
2007년 1월 18일 선원 26명이 탑승하고, 연료유 4,000톤이 실린 영국 선적 대형 컨테이너선 MSC 나폴리호(4,427TEU급, 1TEU는 20피트 표준 컨테이너 1개)가 도버해협에서 위급 상황을 맞았다. 악천후 속에서 선체 외판에 균열이 생기고, 기관실이 침수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선장이 보낸 긴급조난 신호를 포착한 프랑스와 영국 헬기가 출동해 선원 모두 구조됐다.
흥미로운 건 선박의 사고 후 처리 과정이다. 영국 정부는 사고 이튿날 프랑스 영역 안에 있던 선박을 예상과 달리, 영국 남서부 라임만의 포틀랜드항까지 예인한 뒤 임의 좌초시켰다. 영국 언론과 정치권은 프랑스 해안에 가까웠는데도, 자국 영토에서 좌초시킨 것에 대해 일제의 비난했다.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명 구조가 끝났다는 이유로 나폴리호를 수심이 깊은 사고지점에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경오염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가 당장의 여론 비난을 감수하며 수심이 낮은 포틀랜드로 끌고 와 신속하게 화물 및 유류제거 작업을 진행한 덕분에 배에 실렸던 4,000톤 유류 가운데 유출 분량은 200톤에 불과했다. 영국 정부도 완전히 사고 처리를 마무리한 뒤 “임의 좌초시키지 않고 긴급조치를 적기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재앙적 환경 피해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폴리호 사고는 지역ㆍ국가 이기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채 신속한 대처로 대형 해양오염을 막은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반면 2002년 11월 발생한 바하마 국적 유조선 프레스티지호 침몰 사고는 최악의 사례로 대비된다.
벙커C유 7만7,000톤을 적재했던 프레스티지호는 당시 스페인 북서쪽 근해에서 선체에 균열이 발생해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국 해상에서의 해양오염 사고 발생을 우려한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3개국이 입항을 거부하는 바람에 먼 바다를 떠돌다가 6일만에 침몰했다. 침몰 해역은 스페인 가르시아 해안에서 270㎞떨어진 지점으로, 선체가 두 동강이 나고 수심 3,500m 해저로 가라 앉았는데 배에 있던 기름이 쏟아지면서 서로 책임을 떠넘겼던 세 나라의 해안 1,600㎞을 오염시켰다. 또 해양 조류와 어류 등이 떼죽음을 당한 유럽 역사상 최악의 원유 유출 사고가 됐다.
영국이 해양사고에 신속ㆍ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건 신속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마련된 선박구난관리대표부(SOSREP)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1987년 영국과 벨기에를 운항하는 프리엔터프라이즈호 유람선 침몰사고(193명 사망), 93년 유조선 브레이어호(8만5,000톤 유출), 96년 시임프레스호(7만2,000톤 유출) 등 대형 해양사고가 빈발하자 효과적 방재 및 구난활동을 위한 개혁 작업에 돌입했다. 개혁작업은 영국 정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재발 방지대책 마련을 지휘한 민사항소법원장(Master of the Rolls)의 도날드슨경의 26개 권고사항을 토대로 이뤄졌다. 그 중 핵심은 효율적 구난작업 수행을 위해 중요 의사결정권자 1명이 구난작업을 독자적으로 지휘 감독할 수 있는 1인 책임자 제도 도입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99년 SOSREP가 설립됐다.
SOSREP가 설립된 뒤 영국 영해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해와 재난의 예방ㆍ대응ㆍ구조ㆍ복구 작업에 대한 매뉴얼이 정비됐다. 심각하지 않은 사고의 경우 해사연안경비청(MCA)이 담당하고, 긴급 상황이 발생할 때는 MCA 산하 왕실연안경비대(HMCG)가 실질적인 구조 작업을 맡게 됐다. 그러나 대형사고로 번질 위험이 클 때는 HMCG 대신 ‘1인 통솔체제’인 SOSREP이 나서게 됐다.
SOSREP는 교통부와 에너지환경부를 대표해 사고처리 전 과정을 지휘하는 총괄 권한을 보유하는 게 특징이다. 또 필요할 경우에는 선주, 운송용 배를 선주에게서 빌려 쓰는 용선자, 항만오퍼레이터 등 민간에 대한 명령권도 갖는다. SOSREP의 구난작업은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그 결과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정부가 지고, 정치권이나 정부당국은 SOSREP의 구난작업 내용과 의사결정 등 모든 과정에 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책임을 떠넘기다 골든 타임을 놓치거나 초기 대응에 실패하는 걸 방지하고, 정치적 견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 전폭적 지원 덕분에 초대 SOSREP 책임자를 지낸 로빈 미들턴(1999~2007) 재임 중 발생한 672건의 해상사고 중 62차례가 신속하게 직권 처리될 수 있었다. 세월호 침몰 당시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당국이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호선 유럽연합대학원 객원교수는 “정부가 ‘재난안전처’를 만든다고 해도, (영국 사례처럼) 비상시 책임소재와 권한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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