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젓가락보다 나무제품에 초점
생필품 넘어 예술품으로 격상시켜
대통령 해외순방 선물 낙점 화제
연령·용도·상황 따라 종류 무한대
전시품 2000종까지 늘릴 것
국내 제조 인프라 완전히 무너져
공장도 세우고 장인도 육성할 계획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젓가락 갤러리 ‘저 집’에서 젓가락은 작품이다. 수 차례의 옻칠을 거친 뒤 자개와 안료로 단장하고 연 잎 모양 소반 위에 곱게 올려진 젓가락의 풍경에서는, 부엌 개수대에 널브러져 있던 평상시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오래된 절간의 다기처럼 매무새를 가다듬게 만드는 힘이 풍겨 나온다.
‘저 집’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젓가락 갤러리다. 연 지 1년도 안 돼 지난해 디자인어워드 건축(공간)대상, 명인명가상, 서울시 디자인스팟, 한국적 전통생활문화 우수공간 등 4개의 상을 수상했다. 몇 달 전엔 대통령의 해외순방 선물로 이곳의 젓가락이 낙점돼 또 한번 화제가 됐다. 디자인 상품 사업을 하다가 ‘저 집’을 개관한 박연옥 대표는 의외로 젓가락 수집가도 아니고 젓가락 사업을 해본 적도 없다. 젓가락 갤러리를 열기로 결심한 이후 그는 한국식 젓가락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외려 깜짝 놀랐다고 했다.
_‘저 집’의 젓가락엔 어떤 것들이 있나, 누가 만든 것인가.
“기본적으로 나무에 천연 옻칠을 한 젓가락들이다. 옻칠은 살균성과 내구성, 친환경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공법 중 하나다. 또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므로 많은 시간과 공, 기술을 요한다. 옻칠한 젓가락에 자개를 박아 넣은 나전칠기 젓가락, 주칠과 흑칠 후 수 차례 닦아내고 긁어내서 만든 마연칠 젓가락, 옻칠에 안료를 섞어 무늬를 그려 넣은 채화칠기 젓가락, 그리고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 젓가락 등이 있다. 전국 각지의 장인과 디자이너 2명이 만든 것으로 현재 70종 정도다. 앞으로 2,000종까지 늘릴 계획이다. “
_젓가락이 2,000종까지 나올 수 있나.
“’저 집’을 열기 전까진 나도 그렇게 많은 종류의 젓가락이 필요한지 몰랐다. 기획 단계에서 일본과 중국의 젓가락 회사들을 견학했는데 중소 기업에서 나오는 젓가락이 2,000종 정도 되더라. 연령, 용도,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젓가락이 있다. 노인이 쓰기 좋은 것과 유아의 손에 맞는 것이 있고 밥, 국수, 고기 등 음식의 종류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전통식, 현대식, 금속과 접목한 것 등 디자인 별로도 나눌 수 있고 4인 가족 세트, 6인 가족 세트, 돌잔치용 젓가락 등 종류는 무한대다.”
_3만원부터 20만원대까지 가격차가 크다. 비싼 젓가락은 왜 비싼가.
“나무의 가격, 옻칠의 횟수, 색 도수, 나전이 들어가는지 여부 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옻칠은 모든 젓가락에 적용되지만 횟수는 각기 달라 가격 차가 난다. 나전에 들어가는 자개의 가격이 비싸 사용량에 따라서도 가격이 올라갈 수 있다. 젓가락에 사용되는 나무 중 최고급은 흑단인데 한국에서 생산이 안 돼 수입해야 하므로 이것도 가격 상승의 요인이 된다.”
_젓가락 장인이라는 게 따로 있나.
“한국엔 없다. 소반장, 나전칠기장, 옻칠장들이 젓가락을 함께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단가가 낮아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일본엔 젓가락 장인이 많을 뿐 아니라 젓가락을 깎는 사람, 칠하는 사람, 문양을 그리는 사람 등으로 세분화해 있다. ‘저 집’을 기획하면서 놀란 건 국내 젓가락 제조 인프라가 거의 무너져 있다는 사실이다. (젓가락 하나를 가리키며) 이게 10년 전 일본으로 수출하던 젓가락이다. 그런데 지금은 수출은 하나도 없고 수입뿐이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다 보니 중국에 밀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인력도, 기술도, 설비도 전무한 상태다. 젓가락을 문화 상품화하려고 시작했던 일이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로 커질 수 밖에 없게 됐다. 내년쯤 젓가락 공장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젓가락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들의 네트워크도 강화할 생각이다. 장인들이 젓가락 제조를 꺼리는 이유는 일이 불규칙하기 때문인데 정기적인 일감이 생기면 관심도 늘어날 거라 본다. 일단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스타 장인’을 육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젓가락 무형문화재까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정부가 장인들의 생계를 해결한다고 이런저런 행사를 마련하는데 그런 일회성 이벤트보다 업계를 만들고 활성화시키는 게 장기적으로 더 비전이 있다.”
_그런데 왜 하필 젓가락을 택했나.
“원래 전통문화 상품 개발 일을 했는데 좀 더 대중적이고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을 찾다가 젓가락에 착안했다. 일본을 오가면서 젓가락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과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젓가락 관련 전시나 기사에 ‘젓가락은 곧 일본이다’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비빔밥을 가지고 한국의 정체성을 말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저 집’을 운영하면서 한국적인 젓가락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젓가락에 있어 한국 스타일이라는 건 없다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_아시아에서 금속 젓가락을 쓰는 나라가 한국뿐이라 그런지 금속 젓가락을 한국적인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디자인 가능성이나 가격 경쟁력으로 따지면 금속 젓가락이 더 유리하다. 그러나 이미 저가 시장에서 많이 다루고 있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익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정체성이 흐려진다. 젓가락에 문화를 담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당분간 나무 젓가락에만 초점을 맞추려 한다.”
_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다음달부터는 전시품과 유통 상품을 분리할 계획이다. 그러면 ‘저 집’에서는 전시품만 볼 수 있다. 공방과 체험관, 전시관을 하나로 합친 공간을 여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요즘은 서양인 중에서도 젓가락을 잘 다루는 사람이 많다. 체험관에서 젓가락 자격증을 수여한다든지, 외국 작가들과 협업하는 등의 재미있는 이벤트를 구상 중이다.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워 자꾸만 꿈이 커져 걱정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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