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 과거사 정리 요구
위안부 비난 여론 들끓어
자민당 내 진보적 색채
미야자오-고노 라인 합작품
한국대사관 실무자 접촉
의견 묻는 통상적 절차만
서울 본부엔 보고도 안 돼
일본 언론을 중심으로 고노 담화 발표 당시 한일간 협의설이 나돌면서 고노 담화 발표 경위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93년 고노 담화는 당시 미야자와 내각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발표됐다는 게 한일 양국의 공통된 평가다. 우리 정부가 고노 담화의 문구를 조정해달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으로 일본이 담화 작성과정에서 우리측과 사전 협의를 벌였다는 뒤늦은 주장은 본질을 흐리려는 아베 정권의 얄팍한 술수라는 지적이다.
당시 일본 자민당 미야자와 정권은 존립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회당과의 연대가 절실했다. 사회당은 연대의 첫 번째 조건으로 과거사 정리와 반성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가 국내는 물론이고 한국, 미국 등의 위안부 관련 역사자료를 대대적으로 살펴본 것은 그 때문이다. 일본측 인사들은 한국을 찾아 위안부 생존자와 인터뷰를 하고 할머니들의 증언이 담긴 책자를 받아가기도 했다. 고노 담화 준비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여기에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의 성향도 한 몫했다. 그는 보수 일색인 자민당 안에서 진보적 색채가 짙어 괴짜로 통했다. 그와 손발을 맞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도 마찬가지였다. 고노 담화는 미야자와-고노 라인의 합작품인 셈이다.
93년 2월 들어선 김영삼정부의 대일관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만들고 일본을 향해 “물질적 배상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자 일본 정부는 당황했다. 우리 정부의 당당한 태도에 일본 국내여론도 들끓었다. 결국 일본은 같은 해 8월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한일 양국 외교가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 초안을 마련한 뒤 외무성 라인을 통해 평소 교류가 잦던 주일 한국대사관의 실무자와 접촉했다. 상대국인 한국의 의견을 묻기 위한 절차로 우방국간 외교관계에서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당시 우리측 창구는 대사관에서 일본과의 역사관련 업무를 맡고 있던 정무과 소속 조세영 서기관이었다. 하지만 고노 담화 초안의 내용은 서울의 외무부 본부에도 보고되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개입할 사안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특히 우리 정부는 정치적ㆍ도덕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느긋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담화 문구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하거나 일본 정부를 채근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담화 작성과정에 양측이 사전협의를 거쳤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는 게 우리 정부와 외교가의 공통된 주장이다. 외교 소식통은 “당시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에 대해 주일 한국대사관 관계자와 접촉한 것은 우리측 반응을 떠본 것에 불과하다”며 “당시 상황은 정부간 교섭이나 조율과는 거리가 멀고 실무 담당자끼리 오고 가는 대화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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