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나 피아노 등 현악기는 조율이 필요하다. 표준음에 맞게 줄을 골라 놓아도 시간이 가면 줄이 늘어져 진동수가 낮아지기 쉽다. 현악기 연주가 줄에 충격을 주는 것이어서 연주가 잦을수록 조율 주기도 짧아진다. 조율이 잘 돼 귀에 설지 않은, 좋은 소리가 나야 연주자도 좋고, 청중도 좋다. 언론보도에서 흔히 보는 ‘여야 간 조율’ 등의 보도는 쌍방의 협의ㆍ조정 절차를 가리키는 은유다. 조심스럽게 줄을 조금만 조이듯, 은유적 조율도 미(微)조정 위주다.
▦ 외교만큼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조율이 필요한 정치행위도 드물다. 나라마다 문화전통이 다르고, 언어감각 차이도 크다. 좋은 뜻의 언행이 엉뚱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영구 기록으로 남을 문서가 수반된 외교행위라면 더욱 정치한 조율이 요구된다. 공동선언은 물론이고, 회담발표문이나 공동성명 등은 한결 같이 사전 조율을 거친다. 지극히 자유로워 보이는 기자회견에서의 일문일답조차도 최대한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노력한다. 외교 상식이자 정착된 관행이다.
▦ 그런데도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의 일부 문안이 한일 간에 조율된 결과라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몰고 온 파장이 심상찮다.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 작성 경위를 재조사해 확인했고, 주중에 국회에 제출할 보고서에 그런 내용을 담을 것이란 보도다. 한국 정부는 즉각 부인했다. 문제가 된 ‘조율’이 상식적 의미와 달리 ‘압력’으로 확대 해석될 우려 때문이다. 일본 우파의 고노 담화 흠집내기 열의로 보아 기우가 아니다.
▦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일본 정부의 태도다.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면서도 재검증에 매달려 왔고, 보도된 대로라면 정색을 하고 물밑 조율까지 들출 태세다. 조율의 어감에 비추어도 사전 통보, 기껏해야 일부 표현의 미조정이 고작이다. 담화의 방향성을 건드릴 외교적 압력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공개적으로 ‘국내적 금전 배상’ 원칙을 공표하고 일본에 책임인정과 사과를 촉구함에 따라 일본 정부가 도덕적 압박감은 느낄 수 있었겠지만.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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