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아방가르드 대표 작가 페르난데스 작품 국내 첫 출간
검사·아나키스트·대통령 후보 파란만장한 기인의 삶 살아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라는 낯선 이름을 말하기 위해 보르헤스를 끌어들여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고도 슬픈 일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부친의 친구였던 페르난데스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마세도니오와의 우정과 그에 대한 존경심을 물려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보르헤스가 설명하는 페르난데스의 면면을 듣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그의 작품으로 달려들고 싶어진다. “마세도니오에겐 문학이 사유보다 덜 중요했고, 출판이 문학보다 덜 중요했다…밖으로 거의 드러난 적 없이, 오로지 사유의 순수한 즐거움에만 탐닉했던 이…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동안 나는 유명한 사람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들 중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이는 아무도 없다.”
몇몇 일화를 통해 전해지는 페르난데스의 삶은 글을 생산하는 작가보다 기인의 그것에 가깝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검사로 재직 당시 단 한 번도 유죄를 선고하지 않아 해임된 일, 보르헤스의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의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파라과이 삼각주에 ‘아나키즘 공동체’를 세운 일, 초현실주의적인 선거 운동을 펼치겠다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보기 좋게 참패했던 일 등등.
온 몸으로 전복의 가치를 실현했던 페르난데스의 글이 기존의 문학과 완전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아르헨티나의 아방가르드 작가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단 4권의 책만 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국내 출간된 ‘계속되는 무’는 작가 생전에 발행된 4권 중 마지막 책이자 국내에 처음 번역된 페르난데스의 작품이다. 이처럼 문학사에 유의미한 작가가 어째서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지 의문을 품는 독자들은 곧 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담장이 만만찮게 높다는 사실, 아니 담장이 아예 없고 대신 출입구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자전적 에세이와 픽션이 경계 없이 섞인 ‘계속되는 무’는 작가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잡지에 단발적으로 발표한 글과 여기저기 써놓고 잊어버린 원고들을 한 데 모은 것이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소설 미학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풀어 놓고 있어 페르난데스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꽤 유용해 보인다.
연결성 없는 ‘쪽 글’들 사이에서 작가는 수시로 문학의 미덕으로 추앙됐던 가치들을 도마 위에 올린다. 사실주의, 서사, 지식의 축적, 정보의 습득 등 모든 것이 공격의 대상이다. 그는 현실을 최대한 그대로 모사하려는 사실주의 문학을 “(상상력이 결핍된) 황량한 세계”로 규정해버린다. “(소설을 읽으면서) 최고의 상태, 즉 우리의 의식이 극심한 혼란과 동요를 일으키는 상태가 지속되는_가급적 격렬하게 일어날수록 더 좋다_작품만이 가장 예술적인 소설이 될 것이다.”
지식을 “자신이 사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방법이자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려는 욕망”이라고 폄하하는 작가의 도발성은 형식의 파괴로도 이어진다. 독자들은 작가가 삽입한 수많은 괄호와 각주를 장애물처럼 넘어야 하는데, 기진맥진한 이들에게 작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문학의 역사, 미술 비평, 교향곡 분석, 그리고 사회학적 구원 가능성과 같은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장편소설의 시대가 다 지나간 마당에 단편이든 과학 논문에서든 여담 한 번 했다고 한들,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글을 다 읽고 나면 그 난해함이 작가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머릿속에 입력돼 있던 담장과 출입구의 모습을 지우는 것, 서사의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 지식 습득의 무의미한 욕구를 벗어버리는 것, 모두 작가가 애절하게 권유하는 ‘무’의 시작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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