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박현옥 옮김 모시는사람들 발간·208쪽·1만2,000원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박맹수 옮김 모시는사람들 발간·312쪽·1만5,000원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친일 발언을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한 일본 학자의 책 두 권이 국내 출간됐다. 일본의 양심 있는 지성으로 불리는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자대학(奈良女子大?)명예교수의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과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이다.
"양심있는 지성" 나카츠카 교수 日 국민작가 주장의 허구와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파헤쳐
2009년 일본에서 출간된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은 일본의 국민 작가이자 일본 역사소설의 형식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시바 료타로의 작품이 일본인들의 역사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다. 저자가 시바를 주제로 삼은 이유는 일본에서 그의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일본 보수신문 산케이(産經)에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연재된 ‘언덕 위의 구름’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로,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도서를 조사할 때 늘 상위권에 머문다.
일본 패전 당시 군인으로 복무했던 시바가 자국의 군국주의를 혐오하고 메이지 시대를 찬양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그에 대한 인식은 온건 보수 정도이지만, 나카츠카 교수는 그의 작품에 깔린 조선관이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조선 정체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분석한다.
‘언덕 위의 구름’에는 청일전쟁의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부분이 있다. “이제 전쟁의 원인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인은 조선에 있다’해도 한국과 한국인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다고 하면, 조선반도라는 지리적 존재에 있다.” 나카츠카는 이를 나치가 침략을 정당화할 때 끌어들였던 ‘지정학론’이라고 비판한다. 조선을 청국과 러시아, 일본 사이에 끼인 지리적 공간으로만 보고 그것이 마치 청일전쟁의 주요 원인인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시바의 조선 무능력론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저자는 같은 책의 “이씨 왕조는 이미 오백 년이나 계속되고 있고, 그 질서는 노화하였으므로, 한국 자신의 의사와 힘으로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능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좋다”라는 구절을 들어 시바의 조선관을 설명한다. “이것(조선 무능력론)은 러일전쟁을 전후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고 했을 때 활발히 배포된 조선정체론, 조선낙오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 정당화로 나아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은 메이지 초기부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부가 자행해온 역사 위조와 은폐, 왜곡을 파헤친다. 나카츠카 교수가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메이지 영광론’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의 메이지 일본은 훌륭한 국가였지만 쇼와시대에 접어들면서 무모하게 침략을 확대했고 이것이 일본 실패의 원인이라는 국민적 ‘상식’에 대해 저자는, 메이지를 이야기할 때 어째서 조선만 감쪽같이 빠지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단순히 청나라?러시아와 싸운 것만이 아닙니다. 조선도 전쟁의 주요한 무대였습니다…‘메이지는 영광의 시대’라는 시각은 무언가 커다란 것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요?”
그는 1894년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집중 조명하며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왕궁을 점령한 뒤 대대적으로 일어난 2차 봉기가 명백한 항일운동이었다는 것, 일본 정부가 이를 감추기에 급급해 ‘일본외교문서’에도 기록을 일절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다양한 사료와 함께 제시한다. 그리고 일련의 사실들을 근거로 메이지와 쇼와는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메이지에서 드러난 일본 정부의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쇼와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사고방식을 우리는 확실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그 뒤 쇼와의 전쟁 시대의 일본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의 역자이자 1997년부터 저자와 교류해온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책 출간 당시 나카츠카 교수가 일본의 우익 세력으로부터 수많은 협박과 경고를 받았다”며 “그러나 워낙 꼼꼼하고 방대하게 사료를 수집해 쓴 글이라 직접적인 반박을 받은 적은 없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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