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우리 CEO 모임의 1기예요.
제가 제일 처음 시작할 때 그때, 그때는 부부들이 많이 왔어요. 부부들이 와서 제가 1기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강사로 나오는 것은 지금 두 번째 인지 세 번째 인지 잘 기억이 없는데,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뭘 하나씩 나누어드는데 제가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어요. 파워포인트도 없고.
그래서 오늘 아침에 중앙일보에 쓴 저의 칼럼인데, 혹시 중앙일보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한 번 드릴게 없으니까 저야 한번 가서 읽어보시라고 드렸습니다. 저한테 부탁하신 제목은 ‘하나님의 눈, 그리고 세상의 눈’ 이렇게 부탁하셨어요. 우리 목사님이.
제가 이걸 제목을 붙잡고 제가 한번 묵상도 해보고 또 기도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제가 여기서 말씀을 드릴 게 제가 못되는 사람이에요. 왜? 제가 하나님의 눈을 정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눈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로 봐야 되는 데 제가 아직도 그것에 대해서 너무 약해요.
그래서 참 말씀은 드리지만, ‘그러면 너는 세상에 눈을 안가지고 있고 너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냐?’ 라고 묻는다면 제가 참 감히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봐라보지 하고 못하고 우리 많은 사람은 크리스천이지만 살면서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우가 사실은 많습니다. 어쩌면 거의 저도 우리 교회나 나오는 거지.
물론, 교회 안 다니는 분도 계시겠지만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교회 나올 때는 크고, 세상 가서 사업하고 또 일하고, 이럴 때는 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눈으로 우리가 일을 하지 않느냐? 그래야 세상에 가서 경쟁을 하고 세상에 가서 싸워서 거기서 이익도 내야 되고 거기서 승리도 해야 되고 이러니까 자연히 세상의 눈으로 같이 경쟁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하고 반문하실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 우리가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이것의 가장 저는 기본적인 기준을 뭐가 될까 저 나름대로 이 미션을 받고 생각을 해봤어요.
인생의 목적인 것 같아요. 우리가 인생의 이 목적이 내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내가 살면 그것은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사는 것 아니겠느냐, 내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내가 산다면 그것은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뭐냐?’ 내 인생을 하나님 것으로 드린다, 하나님의 도구로 드리겠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맞는 것에 내 인생을 드리겠다. 할 때는 제가 하나님의 인생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는 게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가지 삶의 태도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삶의 태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제가 길게 얘기하지만 여러분들도 많이 느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기업하는 분, 회사나가는 분 다 계세요.
우리가 가장 세상을 살면서 힘든 게 뭡니까? 어려운 게 뭡니까? 저는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황을 지배하려고 해요. 자기가 자기 힘으로 상황을 지배하려고 해. 거의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세상의 상황을 내가 지배할 수 있다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자기가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가 안정감을 느끼는 거예요. ‘아, 내가 이번에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이 상황을 이렇게, 이렇게 가져가겠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가면 이렇게, 이렇게 갈 것이다. 이렇게 가자고 생각을 한다 이거예요.
그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가 자기의 상황을 마음대로 컨트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사람들은 굉장히 자기가 이것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구나, 안전하다는 감정을 혹시 느끼실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람은 살다보면 여러분들도 다 느끼지만 자기가 상황을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됩니까? 사실은 별로 없잖아요. 우리가 왜 불안하느냐, 우리가 왜 사는 게 불안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항상 우리 마음속에는 깊은 곳에 걱정이 있는 거야. 내 마음대로, 내 마음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이 환경이 벌어질 것이다, 라는 것 때문에 우리가 불안한 거예요. 상황을 내가 지배할 수 없을 때 불안감을 느낀다 이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슨 얘기냐. 그런 경우. 상황을 우리가 컨트롤하려고 하는 데 내 마음대로 컨트롤 못한다 이거예요. 그럴 때 뭐를 하느냐,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컨트롤 상황을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한테 믿고 내가 상황에 맡겨 버리는 거 라는 거예요.
‘하나님한테 믿고 하나님이 나한테 잘 해주시겠지’ 하고 믿고 내가 스스로 맡기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저 나름대로는 정의를 해봤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냐?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면 다 매일,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야 되잖아요. 매일 결정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한테 맡긴다는 것은 그러면 나는 아 하나님 이 다 해준다고 하니까 나는 하나님한테 맡겼어. 그러면 나는 잘 되겠지 뭐. 그러면 나는 가만히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한테 맡긴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한테 맡긴다는 것은 그렇게 소극적인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게으르게 나앉아서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겠지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한테 맡긴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한테 맡긴다는 것은 뭐냐?’ 내가 하나님한테 모든 상황에 대해서 신뢰를 가지고 그 신뢰 뒤에 모든 상황에 대해서 내가 감사할 준비가 되어있는 거예요. 내가 감사할 준비가 되는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소극적인 삶이 아니고 나는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내가 하나님 눈으로 이 세상을 사는 거다, 저는 그런 식으로 제가 한번 정의를 해 봤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본 적극적인 삶은 뭐냐.’ 저는 그것이 핵심이 감사라고 얘기했어요. 매일 매일 무슨 일을 하든, 먼저 감사하고 살면 그것이 감사가 감사를 낳고 또 이 감사가 다음 감사로 이어지고 그렇게 된다, 이것은 감사의 법칙이라고 누가 얘기했어요. 감사는 감사를 또 불러온다.
그것은 마치 우리 정리, 수학에서의 정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감사를 해보면 그 감사가 다음 감사를 또 끌어온다 이거예요. 감사들은 서로 서로 통해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무조건 감사를 해라. 무조건 감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조건 감사하려면. 그냥 됩니까? 무조건 감사하려면요? 감사도 훈련을 해야 된다. 훈련. 감사도 그냥 되는 게 아니야. 훈련을 해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척척 감사한 마음을 내 주겠지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우리는 작은 감사라고 자꾸만 자기가 훈련하면 이 감사가 다른 감사를 도 불러오고 이런 다 이거예요. 훈련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물론 주시는 마음인데,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노력을 해서 훈련을 해야 된다. 감사만이 훈련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사실은 훈련이에요. 용기도 훈련이에요. 용기.
그것이 무슨 소리야. 용기가 무슨 훈련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용기 훈련이죠. 여러분, 여러분이 갑자기 누가 지하철이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뛰어 내려가고 그 사람을 붙잡고 올라와도 보통 저 같은 사람들은 뛰어내리지 못해. 거기서 벌써 계산을 하는 거야 뛰어내렸다가 3분 뒤에 오면 어떻게 하나 아니면 못 올라오면 어떻게 하나, 그 사람하고 부둥켜안으면 어떻게 하나, 이런 계산을 벌써 하기 시작하면 결코 거기 뛰어내려 갈 수 없다 이거야.
감사도 그런 식으로 일단 주춤해서 용기도 주춤해서 처음 결정을 못 내리면 용기는 그 용기는 죽어버리는 말아요. 용기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용기에 대해서 끊임없는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이거예요. 무슨 훈련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훈련을 좀 해야 된다 이거죠.
이것은 제가 이런 말씀은 안 드리려고 그랬지만, 자랑으로 제가 하는 얘기가 아니고 이런 훈련이라는 것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리기 위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기자라는 사람, 특히 저같이 매일 글 쓰는 사람은 세상에 평생 일을 해 본게 없잖아. 매일 글만 쓰고 책상물린 그런 삶이잖아요. 이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 되겠냐. 나도 뭘 좀 괜히 말로만 쨀쨀 뭘 잘해라, 어떻게 해라, 그런 것 하지 말고 너도 한번 네 몸으로 뭘 좀 해봐야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제마음속으로의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그래,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내 지금 환경에서.’ 제가 지금 국회의원 나갈 수 있는 저기도 아니고, 그러면 뭐를 네가 지금 할 수 있느냐? 제가 매일아침 분당에서 산보를 하거든요. 중앙공원 뒤에 산도 산보를 매일 거의 한 시간 하는데, ‘아, 그래 청계산도 잘 가고, 나는 쓰레기를 줍겠다, 무조건 쓰레기를 보면 줍겠다.’ 이렇게 저는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쓰레기만 보면 주웠어요. 봉투도 있고 까만봉투 같은 것을 가져와서 주웠어요.
그것도 안 돼. 왜 안 되느냐? 창피해요. 그리고 그렇게 주으려고 하면 혹시 다른 사람이 멀리 저기서 보다가 ‘저 영감은 저런 걸 줍고 있나’ 그러고 또 한편으로는 ‘되게 잘난 척 하네. 자기가 뭔데 일일이 쓰레기를 줍고 저러나’, 되게 또 ‘위선 떠네.’ 이런 얘기 같은 것이 뒤에서 들리는 듯 한 그런 나 나름대로의 뭐라 그럴까요. 저어하는 마음. 그런 것 때문에 쓰레기 줍는 게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요.
여러분, 한 번 해 보세요. 절대 쉽지가 않아. 허리 굽혀서 쓰레기를 이렇게 가다가 줍는 게 쉬운 게 아니야. 그런데 이것을 하루해 보고 일주일 해보고 한 달 하고, 또 지금 오래는 안됐어요. 3개월, 4개월 됐는데, 3개월, 4개월 되니까 이제 제 눈에는 뭐가 땅에 떨어져 있으면 줍고 싶어. 가서. 이렇게 줍고 싶다 나는.
우리 아까 용기도 훈련이라고 그랬잖아요. 용기도 훈련이고, 또 감사도 똑같이 훈련이다. 이거예요. 감사의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된다. 감사는 그런데 훈련에서 오는 것이다. 하는 얘기를 이것은 개인적인 하나님의 눈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을 답을 하나 딱 얘기한다면 일상 개인생활에서는 무조건 늘 감사하는 훈련을 하면 적극적인 삶도 되고 하나님의 삶도 또 살게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개인의 삶은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사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국가, 하고 세상눈으로 보는 국가, 세상눈으로 보는 사회 이것은 또 어떠냐. 아까 제가 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각 개인에 관한 얘기 아니겠어요? 개인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거야. 개인은. 누구든지 내가 감사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 하면 개인은 자기가 감사를 할 수가 있잖아요.
개인은 개인생활은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눈으로서 사회, 국가는 뭐가 다르냐? 그거야. 어떻게 다르고, 과연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국가 질서와 세상눈으로 보는 국가 질서나 나라 질서가 다른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 봐야 되지 않겠나. 제가 개인은 얘기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드리려면, 국가나 나라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까 개인의 눈이 마찬가지로 세상의 사람의 눈과 마찬가지로 기자를.
또 기자얘기를 하네. 기자를 했잖아요. 기자를 했는데, 또 크리스천이야. 그러면 제가 30년을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보면 말이죠. 크리스천 노릇 하기가 어려워. 언론인들은. 왜 그러냐? 여러 사람을 접촉하잖아요. 사람들을 많이 보잖아요. 그것도 보는 사람도 특히 세상에서 잘 나가고, 힘 있고, 돈 있고 이런 사람만 보는데, 그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아니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느냐 이거야. 저런 사람이 어떻게 돈을 저렇게 버느냐 이거야. 저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출세를 하느냐 이거야.
하나님이 진짜 계실까? 내가 보기에는 아주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저 사람한테 저런 복을 주셔서 그런 부자가 되고, 그렇게 무슨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거야.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가 그렇게 어려워.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이게 참 우리 결점이죠.
그리고 우리 세상에 눈으로 우리는 그러니까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요. 세상을 보고 국가를 보고 사회를 보는 데는. 아 그러니까 뒤통수도 쳐야 되고, 적당히 거짓말도 시켜야 되고 말이지 이런 게 다 세상의 눈으로 사회를 보는 것이고, 또 국가를 보면 힘 있는 놈이 제일이야. 무력을 쓰든 쿠데타를 하든, 권력을 잡는 게 제일이야. 그런 것으로 우리가 세상을 본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게 옳은 것이냐 말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냐. 하는 것의 문제제기가 된다 이거죠.
우리가 세상의 눈으로 국가를 보고 사회를 볼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뭡니까? 과학이야 과학. 과학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는 세상이 보인다고 얘기를 해요. 그것이 소위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이런 것이 다 과학 아니예요. 사회, 과학이죠. 사회, 과학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거예요. 다.
저는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정치학을 전공했으니까 정치학에서 권력이라든지 권력론이라든지 이런 것을 보면 그것이 무슨 하나의 과학적인 법칙이 있어서 과학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거야. 모든 사회과학자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경제학자가 경제학이야 말로 사회·과학 중에 사회과학이다, 가장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게 경제학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돈이라는 단위가 있기 때문에 이 단위로 인해서 경제를 분석할 수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의 눈으로 나라를 본다거나 사회를 볼 때 우리 사회 과학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그 사회과학의 기본적인 게 뭡니까? 과학의 기본적인 게 뭡니까? 일반 과학의. 법칙을 알아나는 것 아니겠어요? 법칙. 물리학. 또 천체학이라고 하면 왜 지구는 태양을 돌고 우주의 태양계에 있는 위성들은 왜 태양을 도는가? 어떻게 몇 년마다 도는가? 주기가 있단 말이에요. 몇 년에 한 번 씩 돌더라. 매일 돌더라. 그런데 영원히 돌더라. 그러면 이게 법칙이다. 이게 바로 과학의 법칙이다.
법칙이 있으면 그 사회 현상이나 그 천체 현상이나 물리학 현상이나 그 법칙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과학이라는 것은 즉, 세상의 눈으로 세상, 사물, 물체를 보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줄 알았어요. 저는. 그런 줄 알았는데, 사회과학? 그것이 어떻게 법칙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사회과학으로 해결된 게 있습니까? 경제학 여기 하신 분들 많이 계실지 모르지만, 경제학 하신 분들이 2008년도에 금융위기 한 번도 예측한 있어요? 세계 경제학자 중에서 2008년도 금융위기 예측한 사람 아무도 없어. 법칙이라는 게 있으려면 법칙이 있고, 법칙은 왜 있느냐, 우리가 미래에 벌어진 일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게 법칙이라 이거예요. 그런데 사회과학에서 가장 과학이라고 얘기하는 경제학도 아무도 금융위기를 누구도 예측은 못했어요. 그런 경제학 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 소용없는 거예요. 법칙이 없고 법칙을 모르니까. 정치학은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이 세상의 눈으로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은 점점점점 과학에 대한 저기가 더 불신이 있고, 불신이랄 것은 없지만 하여튼 양자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기 물리학 하신 분들. 양자론이라는 것은 우리 분자, 원자, 중성자, 이런 단위를 더 내려가면 최하의 단위로 가면 양자라는 게 있어요.
양자라는 게 있는데, 분자나 원자나 중성자 까지는 규칙적인 게 다 발견이 되어 있어요. 원자는 중성자를 중심으로 돈다, 분자는 어떻게 구성이 되어있고 이런, 이런 법칙으로 움직인다 이런 게 다 있는데, 더 내려가서 양자를 들여다보니까 양자를 들여다본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양자라는 것은 법칙이 없는 거야. 우리는 분자는 이렇게, 이렇게 돈다고 생각했는데, 양자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거야. 제멋대로. 이쪽으로도 가고 어느 때는 이쪽으로도 가고 자기마음대로 움직여.
거기서는 법칙을 발견할 수 없어요. 물리학자들이 깜짝 놀라는 거야. 이게 이렇구나. 과학이 법칙을 발견할 수 없기도 하는 구나. 하게 과학자들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양자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양자는 자기마음대로 움직이지만 자기마음대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쳐다보는 사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또 마구 움직이는 거야. 구멍을 뚫어놓고 관찰자가 '야, 너는 이쪽으로 좀 가봐.' 이렇게 자기 마음을 먹으면 그 양자가 그쪽 구멍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과학이에요? 과학은 그렇게 해석이 될 수 있겠어요. 관찰자의 마음의 의지에 따라서 막 움직이는데. 참 기묘한 거지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으로 항상 익숙하게 나라를 보고 또 사회를 본다면 그것은 지금 양자론에서 제가 주장하듯이 사회를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진다는 이거예요.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진다. 제가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 한국역사를 보면 그렇다 이거예요. 제가. 한국역사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역사를.
우리나라가 100년 전, 120년 전으로 한번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셔서 우리 조선말의 우리를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때 조선에 처음 설교사가 들어왔어요. 1832년에 피츨라프라는 독일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몽금포 저기 장산곶 있는 데로 들어왔어요. 이 사람이 들어와서 설교도 하고 통상도 하자 그러니까 그때는 쇄국정책 할 때니까 ‘안 된다’ 하고 쫓아냈어요. 그 사이에 잠깐 내려서 이틀인가 몽금포를 돌아다녔어. 거기서 몽금포 사람들 사는 걸 알았죠. 그리고 그 다음에 30년 뒤에 파리 왜방 선교사 달래라는 사람이 또 한국에 왔다 갔어.
그 다음에 중국 가서 ‘코리아 역사’라는 것을 썼어요. 거기에도 그 당시에 한국 상황이 나와. 저는 그 당시 얼마나 우리 조선이라는 게 엉터리고 이런 나라였나 하는 것을 지금 책에서 지금 제가 발췌를 한 것인데, ‘조선 사람은 불결했다, 끔찍한 거처에서 살고 있었다, 피부는 때로 덮여 이가 득실댔다. 그 사람들은 그 이를, 해충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잡고 있는 데 부끄러워 할 줄 몰랐다.’
조선의 보고에요. 아주 그냥 시골에 조선말에 시골이라는 형편없는 동네란 거예요. 달래 신부가 가서 보고 한 것을 보면, 어디 병기고를 가서 본 적이있는 모양이에요. ‘병기고 속에는 무기도 탄약도 없다. 다 팔아먹었다, 대신 고철 나부랭이 헌옷만 갖다 놓았다. 아전과 수령은 그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다 수탈했다. 백성은 곤궁해서 서해안에서는 쌀 한말에 어린 딸을 쌀 한 말에 팔고 있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조선이에요. 배고프고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한테 딸을 쌀 한말에 파는 거야. 1870년, 1840년 이때. 공양미 300석 심청이가 거짓말이 아니라 이거예요. 다 그런데 그것은 300석이나 받았는데, 여기는 쌀 1말 가지고 딸을 파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우리나라가 형편없는 나라였다 이거예요.
비숍 여사라고 영국에 있는 약간의 귀족인데, 이 사람이 1894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한 2년을 지냈어요. 우리나라 방방곡곡 다 다녔어. 그래서 저 부산에서부터 저쪽 연해주까지, 그리고 한강을 따라서 삼척까지 다 갔어요. 갔는데 여러분들이 사볼 수 있어요. 재미있어요. 그런데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가 많은지. 그런데 얼마나 조선이 불결하고 더러운지, 하여튼 이 사람은 조선하면 넌더리를 치는 거예요. 이렇게 불결한 나라가 있느냐 이거야.
이 사람이 동네에서 부산 동네에서 일본인들이 사는 지역에 갔는데 그렇게 깨끗하더래. 일본인들이 사는 지역은 깨끗한데, 거기에서 딱 그 지역만 벗어나니까 얼마나 조선사람 사는 데는 더러운지 서울 한양을 왔더니 한양은 더럽게 더 말할 수가 없는 거야. 도랑, 하수도도 없고 상수도도 없는 나라 아니에요? 이 서울에 그때 몇 십 만이 살았을 텐데 도랑에 뭐 오줌, 분뇨 다 버리고 그러니까 냄새가 나서 서울은 못살겠다 이거예요.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가 그렇게 되어있는 나라였어요.
그런 나라가 어떻게 됐어요, 지금? 그런 나라인데, 지금 어떻게 되어있는 거냐 이거죠. 그러면 그때 여러분이 사회과학을 하고 정치학을 한다는 학자로서 만일 왔다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100년 뒤에 이런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상상이나 해 봤겠어요? 상상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서 그것을 우리는 세상적으로 보면 기적이라고 얘기하죠. 그래서 우리 기적이라고 그러잖아요?
앞으로도 얘기하겠지만 우리가 소득이 얼마예요? 80달러였잖아요. 79달러. 1945년 해방되고 그 다음에 6.25 끝나고 다 79달러랬어요. 아프리카 가나하고 비슷했어요. 79달러. 세계 120개국 중에서 120위 이런 정도죠. 아프리카하고 똑같은 가나하고 똑같이 제일 꼴찌인데, 가나는 지금도 꼴찌에요.
우리는 왜 지금은 이렇게 10위의 국가가 됐느냐 이거예요. 왜? 그것을 사회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물론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죠. 사무엘 헌팅턴 이라는 하버드 대학 교수는 그것을 문화론으로 해석하려고 해요. 조선 사람들은 교육문화가 아프리카사람들하고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그랬다.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기적이라고 얘기를 하죠.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바꿔서 한번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어떻겠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 이거죠. 저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변한 것, 저는 이중에 기독교인이 아닌 분, 크리스천이 아닌 분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무슨 크리스천을 강요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근대사를 보면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빼고는 해석할 수 없어. 개신교의 역할이 어땠는가가 한국 근대사의 핵심이라 이거예요. 왜 그러느냐, 1882년 한미 수호통상 조약 이후에 설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왔잖아요. 많이 와서 그 설교사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설교사들이 와서 학교 짓고 병원 짓고 다 했어요. 그리고 그때 한국에서 소위 각성을 한 사람. 개화를 해야 되겠다, 갈망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다 크리스천이 됐어. 크리스천이 됐는데, 제가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두 사람을 뽑았어.
윤치호라는 사람 알죠? 이 사람 나중에는 윤치호씨가 친일파로 돼서 1946년인가 돌아가셨는데, 친일파가 됐어. 그런데 이 사람은 1881년에 만국신사관람단이라고 해서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구경하고 그때 미국대학, 벤더빌트 대학을 이 사람이 다녔던 사람이에요. 1882년. 지금부터 몇 년이예요? 130년 전에. 최초의 유학생일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인데, 이 사람이 가서 보고 나서 야 조선이 살길은 기독교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자기가 일기에 다 썼어. 이 사람이 영어로 일기를 쓰는 사람이에요. 이사람 그때부터 지금 죽을 때까지 일기를 매일 썼어. 그런데 한국말로 쓴 게 아니고 영어로 일기를 썼어. 언제? 1881년, 1882년 이때. 그러니 우리는 다 가서 죽어야죠. 우리는 사실, 다 죽어야지. 130년 전에 가서 자기 미국 가서 공부 몇 년하고 와서 자기 전부다 영어로 일기를 매일 썼는데 영어를 몇 년을 합니까? 몇 년하고.
저는 미국 가서 특파원도 하고 그래서 한 8년 이상은 미국서 공부도 하고 살았는데 영어로 이걸 쓰라고? 골치가 아파서 쓸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이 사람은 다 영어로 썼어. 그것이 다 윤치호 일기라고 해서 다 번역돼서 나왔어. 이것을 보면 ‘조선급선무는 국민의 지식과 견물을 넓히고 도덕과 신의를 가르치며 애국심을 기르는데 있다, 조선의 교육을 도와주며 백성의 기상을 회복시킬 기개는 예수교밖에 없다’ 이런 얘기를 다 썼어요. 1889년의 일기야 이게.
그리고 그 당시 아까 얘기했잖아요. 한국사람, 조선 사람이 더럽고 일 안하고 그냥 다 일안한 이유는 있어요. 사실. 왜냐? 수탈을 당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뭘 가지고 있는 것만 알면 아전, 수령, 원님이 와서 다 뺏어 가는 거야. 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까지 다 아는 거야. 그런데 비숍 여사가 아주 이것을 예리하게 통찰을 했어.
그러니까 백성들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거야. 그리고 게을러지는 거죠. 그리고 조금만 친척 중에서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나라 옛날에 다 그 친척집에 몰려가서 뜯어 먹었잖요. 일 안하고 다 그렇게 살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비숍 여사가 연해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있는 데를 갔어요. 갔더니 거기에 조선인들이 와서 이민을 와서 이주해서 사는데 그렇게 깨끗하고 그렇게 잘살고 그러더라 이거야. 깜짝 놀랐어. 왜 그러냐? 한국 땅에 있는 조선인은 왜 저렇게 더럽고 게으르며, 연해주에 와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깨끗하고 왜 이렇게 부지런 하느냐, 그 사람이 분석하기에는 연해주에서는 수탈이 없다 이거야. 양반들, 이런 사람들이 뺏어 가지 않는다 이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벌어서 깨끗하게 가서 살아야 한다. 깨끗하게 사는데, 그러니까 이 조선사람 게으른 것, 이것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왜 노동을 안 하느냐 이거야. 노동은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조선의 미래가 노동에 의존한다는 것을 배우고, 기독교는 노동의 종교라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 노동을 가르쳐야 하는데, 조선인한테. 그것을 가르쳐주는 데는 기독교 밖에 없다 이거야.
이 사람은 끝까지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어요. 비록 친일은 나중에 했지만, 1938년 이후에 몇 년간 친일을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기독교를 끝까지 가지고 죽은 사람입니다. 하여튼 이 사람이 그렇게 한국이 그런 엉터리 같은 환경에서 기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또 한사람, 제가 아까도 얘기했는데 이승만이라는 사람 여러분 잘 알잖아요. 이승만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에는 과거 시험 준비했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신학문을 배워야 되겠다고 해서 배재학교를 갔어요. 배재학교를 가서 그 다음에는 독립협회 이런 운동을 했는데, 운동을 하다가 감옥소를 갔어요. 감옥소에 갇혀서 4년 5개월 있었어.
그런데 이 양반이 감옥소에 있으면서 소위 주님을 영접한 거야. 이승만 대통령이. 4년 5개월 동안 있으면서. 주님을 영접해서 아주 신실한 신자가 됐어. 신실한 신자가 돼서 감옥소에서 매일 성경강의를 하는 거야. 이 사람이 성경 번역도 했어요. 우리말로 처음. 하다가 중간에 그만 뒀지만. 죄수들을 모아놓고 성경강의를 하고, 성경 강의 할 때는 간수들도 와서 듣고, 그래서 죄수도 40명이 소위 개종을 했어. 기독교로 설교사들이 깜짝 놀랐지. '야, 어떻게 이렇게 감옥소에서 개종을 할 수 있느냐' 깜짝 놀라서 이승만이라는 사람을 다시 봤다는데. 이승만도 똑같애.
똑같이 한국은 기독교로 밖에 살길이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았어요. 그가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독립정신이라는 책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당시의 한국의 조선의 상황, 러시아, 일본, 청나라, 미국, 이런 것에 대한 국제정세, 이런 것을 쓰고, 또 조선은 어떤 개혁을 해야 되겠느냐, 무슨 정체를 가져야 되겠느냐,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해야 된다, 이런 것을 쭉 쓴 책인데, 그 말미에 뭐라고 쓰여 있느냐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맨 끝에 결론이에요. '지금 우리나라가 썩고 쓰러진 데서 일어나라면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리므로 우리가 기독교를 무슨 일의 근원으로 삼아 이나라를 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영국이나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나라에 이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승만이 1984년에 감옥소에 쓴 결론이에요. 우리나라가 살길은 기독교밖에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비록 일본한테 강탈을 당했지만 기독교로 인해서 우리나라가 일제 때 교회가 많이 생기고, 병원이 생기고, 학교가 생기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계몽하고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1919년 3.1운동의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어요.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 번 생각해 보셨어요? 왜 일본은 그런데 기독교가 안됐어? 왜 한국은 기독교가 됐어? 그리고 우리는 지금 천만이야. 기독교인이. 일본은 지금 0.1%, 0.2%밖에 안돼. 왜 그러느냐 이거예요. 우리가 세상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것을 해석을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을 해본다면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사용하신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있으시기 때문에 근대화 시작부터 기독교를 이쪽으로 우리나라를 가게 해준 게 아니냐, 하는 것이 한국 역사를 소위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해석한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저는 있겠다, 제가 이것은 제 주장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주장도 아니고, 그런 주장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눈으로 대한민국 근대사를 볼 수 있겠다, 그것은 그 다음에는 마찬가지예요. 독립을 얻었잖습니까? 독립을 얻고 그런데 싸우다가 6.25가 났어요. 6.25가 났는데 6.25는 6.25가 났을 때 우리가 공산 북한을 물리칠 수 있었어요 ? 없었어요. 아무런 힘이 없었어요.
그런데 넘어오는데 투르만이 일요일인데 어떻게 와서 우리가 미국이 참전한다는 것을 바로 결정을 해 줬어요. 그것도 지금 보면 지금 정치학자들은 어떻게 투르만이 그런 결정을 했느냐 이거예요. 그것 참 어려운 이해다. 왜냐? 1948년, 1949년 미국은 철수했어요. 한국에서. 왜? 한국은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다. 그래서 국무장관 에이스친이 라인을 그었어요. 그런데 한국은 제외됐어. 미국이 방위를 책임지는 선을 넣었는데 그 선은 대만하고 일본까지만 이렇게 되어있고, 한국은 제외가 됐어.
그러니까 그것보고 소련하고 중공하고 김일성하고 '야, 미국이 여기 떠나고 자기들 책임 안진다고 그러니까 관심 없다니까 내려가자.' 내려온 게 6.25라 이거예요.
그러면 그때 그렇게 떠나간 미국이 왜? 왜 금방 그렇게 하루 만에 참전결정을 하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한미사를 연구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야. 이 얘기를.
6.25 전쟁 나서 1년 만에 미국은 또 도망가려고 그랬어. 미국은 전쟁이 나서 사상자가 1,000명만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도망갈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여론국가이기 때문에. 사상자. 전사자 백. 그것을 백(bag)이라고 하는 거예요. 시체 백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휴전 생각을 한다 이거야. 미국 사람들은.
그런데 한국이 1년이 지났어요. 처음에는 9.28 수복이 된다고 해서 올라왔는데, 중공군이 내려오니까 뭐 이것 밀려서 또 내려와서 서울을 뺏기고 오산까지 내려왔잖아요. 그 다음부터 교착상태야. 사람은 자꾸만 죽어. 시체 백은 미국으로 자꾸만 가. 그러니까 얘가 ‘안 되겠다. 빨리 끝내자. 전쟁을 끝내자.’ 미국은 전쟁을 끝내려고 그랬어요. 1년 만에.
그런데 그러면 끝내면, 이것은 도대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침략당하고 죽을 사람은 수백만 다 죽고, 너희들 떠나면 한국은 어떻게 되느냐? 이승만 박사 걱정이 그거였어요.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되겠어요? 미국이 그때 휴전하고 떠나면. 그러면 월남이 휴전하고서 월남이 망하고서 한국이 망하는 거죠. 그때도 똑같이 망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승만 박사가 ‘안 된다! 미국이 우리나라 방위를 책임을 져라. 도장 찍지 않으면 너희들 떠날 수 없다.’ 그래가지고 체결한 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에요.
그러면 그것도 우리가 보통 세상에 논리나 사회과학 입장에서 본다면, 미국이 그런 것 해줄 리가 없어요. 그런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이 됐어. 그것 참 이상한 거거든요. 물론, 이승만 박사의 리더십이나 고집도 있었지만, 그런 것을 우리가 세상의 눈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러면 왜 미국한테 그것으로 인해서 한국이 소위 서방진영에 속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확실한 반공주의가 그때 생겨났습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는 좌우대립이 심해서 남쪽에도 소위, 좌익이 더 많았다. 그런 소리도 있었어요. 그 정도인데, 6.25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반공국가가 됐다 이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뭐로 해석할 수 있느냐? 이거예요. 그것도 일종의 기적이다 이거예요.
여러분, 그 다음에는 더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경제기적. 그것 다 기적이라고 그러잖아요. 한국이, 한국한테 어떻게 그런 경제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세계에서 2차 대전 이후에 탄생한 신생국 모든 나라, 한국 같은 나라 단, 한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 10위가 된 국가, 국력이 10위가 된 국가가 하나도 없어요.
또 민주주의 이만큼 하는 나라 아무데도 없어요. 그러니까 모두들 한국이. 특히 오바마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이 기적 같은 나라니까, 미국이 도와서 이렇게 됐다고 자기들은 미국의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러는데, 어떻게 이런 기적 일어났냐 이거예요.
왜, 우리한테. 그것은 저는 하나님의 눈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우리나라 근대사를 본다면. 지금 현대까지를 본다면 하나님의 눈으로 밖에는 한국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인간들은 현재, 이게 현재죠. 과거, 미래, 이렇게 구분하면서 있잖아요. 오늘, 내일, 어제 이렇게 다 구별하잖아요?
하나님은 현재, 내일, 모레, 이런 게 있을 까요?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만 있는 분이다, 영원한 현재만 있는 분이예요. 우리 인간이 미래가 있고 현재가 있고 과거가 있었습니다. 왜 이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앞서 가신다는 의미가 뭐냐. 하나님이 이미 미래를 다 가지고 계시는 거야. 미래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라고 생각하지도 않죠. 이 민족은 내가 점찍어서 내 자식으로 나의 샛별로 기르겠다. 하는 의도가 있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이 그렇듯이 한국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거죠.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항상 지금까지 끌어오셨습니다. 제가 기독교 역사 지금 쭉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전부다 끌어오셨어요. 미리 다 준비하셨어요. 어떻게 준비하셨습니까? 미리 앞서서 다 치워주셨어. 일본 치워서 우리 해방시키고, 6.25 나서 미국이 다 들어오게 다 앞서서 치워주시고, 그러고 중국, 일본 우리한테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까? 청나라, 일본.
그런데 청나라가 옛날에는 우리 나쁜 사람이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근대화할 때 경제개발 할 때 중국은 무엇을 했습니까? 문화혁명을 했어요. 중국은 1980년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서로 문화혁명으로 지금 싸우고 붙고 해서 아주 생활이 형편없어졌어. 그때 우리는 이미 벌써 우리는 1980년에 이미 3차 5개년 계획까지 다 해서 우리는 껑충 뛰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중국에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는 거야. 그때 누가 중국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리나라 살리려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왜 일본을 우리 옆에 뒀습니까? 하나님은 일본을 왜 우리 옆에 뒀어요? 그래서 우리 침탈하게 했잖아요.
한반도를 보면 과거는 뭐라 그랬습니까? 우리가 '야, 참 강대국의 질곡 속에 태어난 나라다. 한반도는. ' 다 둘러싸여 있어. 중국, 러시아, 일본, 다 둘러싸여서 조그만 반도는 질곡 속에 있는 반도라 이거예요. 그런데 현대사에서 질곡입니까? 아니죠. 일본이 있으니까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받아와서 우리가 경제개발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일본, 지금 우리 보다 일본은 점점 사그라지잖아요. 그러면 질곡의 지정학이 아주 축복의 지정학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거라 이거예요.
이것은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어요. 세상의 눈으로 해석할 수 없는 거란 말이에요. 또 하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의 눈을 가지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준비되기까지 또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입니다. 그래, 가만히 한국의 발전을 보면 제일 필요한 안보, 안보를 이승만 대통령 때 완결을 시켰어요.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어서 안보를 만들었어요. 안보가 튼튼하니까.
그 다음에는 뭘 만들었어요? 기다렸다가 경제를 우리를 잘 발전시키게 했어. 경제를 발전하니까 그다음에는 뭐했습니까? 민주주의를 그 다음에 만들어 주셨어. 그러니까 안보, 경제 민주주의, 이것이 순차적으로 잘 됐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된 것이 아니냐, 그것이 세상눈으로 보면 기적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이 이 나라를 분명히 도구로 쓰시려고 한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냐,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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