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문화부기자 aurevoir@hk.co.kr
아이들을 돌봐주실 시부모님을 따라 2년 전 이사해 들어간 아파트 단지 안에는 때마침 혁신학교로 지정된 초등학교가 있었다. 취학 한참 전인 두 아이를 데리고 영문도 모른 채 입주했다가 순식간에 전세금이 1억원 넘게 올라버려, 즐비한 부동산중개업소 앞을 노상 뒷목 잡고 지나다녀야 했던 아파트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주변 아파트에서 위장 전입해오는 사람들도 많아 한동안 엘리베이터 안에는 ‘입주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위장 전입자를 색출해내겠다’는 살벌한 공고문이 수시로 나붙기도 했다. 도대체 혁신학교가 뭐길래!
6ㆍ4 지방선거에서 혁신학교 확대를 공약으로 내건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바야흐로 공교육의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리라는 장밋빛 전망들이 만개하고 있다. 전국 17개 시ㆍ도교육청 중 진보교육감을 배출한 13곳 외에 보수 교육감이 당선된 대전시까지 혁신학교 도입을 결정했다니, 진보진영의 이 히트상품이 명실상부 우리 교육의 거부할 수 없는 새 패러다임으로 부상한 듯하다. 전국 초ㆍ중ㆍ고교에 1,000개가 훌쩍 넘는 혁신학교가 들어서게 되면 일단 전세금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가 되긴 하지만, 나로선 어쩐지 혁신학교 성공 여부에 대해 크게 낙관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두 아이의 놀이터 사교생활을 통해 약소하게나마 구축된 ‘동네 엄마 네트워크’에 따르면, 혁신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아이는 너무나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고, 아이가 행복하다니 좋기는 한데, 뭔가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로 요약할 수 있는 그 감정은 거의 명언의 반열에 올라도 좋을 칼럼니스트 김규항의 진단과 일맥상통한다. ‘보수적인 부모는 자녀가 단지 일류대생이 되길 원하고, 진보적인 부모는 자녀가 의식 있는 일류대생이 되기를 바란다.’
“애가 학교에서 배추만 뽑고 있어요. 생태체험도 좋지만 공부를 너무 안 시켜요.” “단원평가 말고는 시험을 전혀 안 보니 학업에 긴장이 없어요.” 혁신학교는 바람직한 교육 모델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입시에 최적화된 교육 시스템은 아니다. ‘공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놓고, 장차 이 학교가 입시에서도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엄마들은 회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교육의 목표가 명확하다. 명문대 입학이다. 그것은 진보적인 엄마든, 보수적인 엄마든, 중도적인 엄마든, 매한가지다. ‘아무것도 안 시키고 자유롭게 키웠어요’라고 육아서적에 쓸 수 있으려면 인과관계가 어찌 됐든 아이가 명문대에 들어갔어야 한다. 내 아이가 공동체의 선에 복무하는 시민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도 일단은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하길 원한다. 이것은 탐욕이나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명문대라고 나와봤자 대단할 것도 없음을 수도 없이 목도하지만, 그마저도 이뤄내지 못하면 생존 가능한 생태계에서 아예 축출되고 마는 세상 아닌가. 천지개벽이 없는 한 이 지독한 입시경쟁은 종식될 수가 없다.
배추의 생장과정을 요약, 설명해주고 암기시키는 데는 몇 분이면 족하다. ‘압축교육’이다. 하지만 직접 배추를 키워보며 자연의 구조를 익히는 데는 일 년이 걸린다. 그 안에 시험문제가 나와버리면 아마도 틀릴 테지만, 이렇게 익힌 지식은 영원히 존재에 각인된다. 문제는 서서히 그러나 깊이 배우고 있는 이 ‘숙지의 시간’을 엄마들이 견뎌낼 수 있느냐이다. 보수언론은 벌써 혁신학교의 학력저하를 주장하며 시비를 걸 태세다. 머잖아 10여년 전 평준화 논란이 되풀이될 테고, ‘명문대생 ○○명 배출’의 플래카드를 내걸지 못하면 혁신학교에 대한 지지도 순식간에 철회될 것이다. 또다시 공동체 교육에서 수월성 교육으로, 한국 교육의 진자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잘 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데, 엄마도 그럴 수 있어?” 입주민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혁신학교에 다니는 5학년짜리 아이의 말이다. 일단 보장된 혁신학교의 수명은 4년. 우리는 이 4년이나마 기다릴 수 있을까. 명문대를 가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에 1㎝라도 다가가기 위해 힘을 모으는, 혁신학교에 걸맞은 ‘혁신엄마’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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