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남영호 침몰사건 이후 운항관리자 제도 첫 도입
선사서 월급 대부분 부담에 눈치 보느라 안전점검 대충대충
서해훼리호·세월호 참사 되풀이
4월16일 오전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가라앉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세월호의 안전점검을 담당한 해운조합 인천지부 운항관리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로펌에 법률자문을 구한 것이었다. 이들을 수사한 송인택 인천지검 차장검사(해운비리 특별수사팀장)는 “구조가 급박했던 시점에 운항관리자들은 ‘화물이 고박된 것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형사책임을 물지 않아도 된다’는 로펌의 답변을 받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두고 대응했다”고 밝혔다. 업무상 과실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운항관리자는 여객선 탑승인원 및 화물 점검, 구명기구 및 소화설비 등 확인, 해역별 기상 및 해상조건 파악, 안전운항에 필요한 운항정보 제공 등의 업무를 맡는다. 1970년 323명이 사망ㆍ실종한 남영호 침몰 참사를 계기로 도입됐다.
그러나 인천지부 운항관리자들은 지난해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총 150여차례에 걸쳐 별다른 확인절차 없이 여객선의 출항 전 안전점검보고서를 선장이 무전을 통해 불러주는 대로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월호의 안전점검보고서 역시 항해사가 대충 적어냈고 운항관리자는 실제로 점검을 하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이들은 “선박 안전 점검을 제대로 해서 출항정지라도 시키면 (해운조합이) 인천 근무자들을 완도나 목포로 근무지를 바꿔버린다. 우리만 나쁜 놈으로 몰지 말라”고 항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영호 사고 이후 40여년이 흘렀고 그 사이 대형 선박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운항관리자 제도는 조금씩 보완되긴 했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지금도 상당수 승객의 안전은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있다.
남영호 사고로 도입된 운항관리자제도
1970년 12월15일 새벽 부산~서귀포를 운항하던 남영호가 기준치(130톤)의 4배가 넘는 화물, 정원보다 110명이나 많은 승객을 싣고 운항하다 파도에 휩쓸려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탑승객 338명 중 목숨을 건진 사람은 고작 15명뿐이었다. 화물선적 당시 점검을 책임진 선장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당시 선박 점검은 선장이 자체적으로 실시했었다. 사고 이후 정부는 해상운송사업법에 운항관리자에 대한 조항을 신설해 1973년 12월15일 운항관리자 17명을 인천, 부산, 목포, 완도 등 11개 지역에 처음 배치했다. 이후 운항관리자 정원은 이듬해 13명의 통신사를 포함해 59명까지 늘었다.
그러나 20년 후 발생한 서해훼리호 침몰 참사는 운항관리자의 관리 사각지대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1993년 당시 48명이던 운항관리자는 19개 주요 항구에만 배치돼 있었을 뿐 서해훼리호가 운항하던 격포항 등 규모가 작은 항구에는 아예 운항관리자가 없었다. 승객이 140여명이나 초과 탑승했던 서해훼리호의 안전점검보고서는 선장이 멋대로 기재한 뒤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서해훼리호의 운항점검을 책임지는 운항관리자가 있긴 했다. 약 50㎞ 떨어진 해운조합 군산지부 운항관리실이 관리 책임을 졌지만 교신 장비는 송달거리가 24㎞에 불과한 초단파무선전화기 1대가 전부였다. 서해훼리호와의 교신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정부는 그제서야 통신사를 포함한 운항관리자 25명을 증원해 취약지역 등에 추가 배치하고 여객선 전용 중단파대 통신망을 보강했다.
그러나 지금도 상당수 낙도 지역의 항구나 선착장에는 운항관리자가 없어 해경이 간단한 승선인원 정도만을 점검하고 있는 실정이다. 21년 전 서해훼리호는 위도에서 격포항으로 나오다 사고가 발생했지만 현재 운항관리자는 격포항에만 배치돼 있다. 위도에서 안전에 심각한 결함을 갖고 출항할 경우 이를 막을 수 있는 사전 대비책은 없는 셈이다.
돈 앞에 흔들리는 안전
서해훼리호 사고를 기점으로 운항관리자의 정원은 한 때 91명까지 늘었지만 2003년부터 다시 줄기 시작했다. 원인은 선사가 여객 운임의 일부를 해운조합에 떼어줘 운항관리실 운영 비용으로 충당하는 분담금 제도 때문이었다. 매년 65억여원이 들어가는 운항관리실 비용은 지금도 대부분 선사를 통해서 지급되고 있다. ‘월급을 받는 직원이 사장을 감독’하는 기형적인 구조다.
운항관리자가 처음 도입된 1973년에는 여객 운임의 2%가 운항관리실 비용으로 돌아갔다. 1983년 4월 제주를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동남점보훼리호가 조난을 당해 12명의 승객이 사망하자 4%로 상향 조정됐고,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후인 1995년에는 5%까지 올렸다.
비율이 올라가는 만큼 선사들의 불만은 커졌다. 승객들이 내는 돈이라고 해도 선사 입장에서는 수입이 줄어드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내항여객선업계의 경영 악화를 막는다는 취지로 4%로 인하했고, 이후 선사들의 비용부담 완화를 이유로 2010년 3.5%, 2014년 3.2%까지 내렸다. 이에 따라 2000년 91명까지 늘어났던 전체 운항관리자의 수는 2001년 86명, 2005년 73명, 2010년에 다시 62명까지 줄었다. 해마다 1억4,000만~10억여원 가량 지원되던 국고보조금은 2005년부터 끊겼다가 선사들의 요구로 2010년 이후 다시 지원되기 시작했다.
해운조합 안전운항실 이문규씨는 “조합의 적자가 많아 조직 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운항관리자들의 정년 퇴직 수 정규직 신규 채용을 억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며 “그나마 정부 보조금이 다시 나오면서 다시 숫자를 늘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보조금이 다시 지급되기 시작한 이후 운항관리자 수는 지난해 74명으로 조금 늘었지만 선주들과 운항관리자들 간의 기형적인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윤종휘 한국해양대 교수는 “선박 감독에 들어가는 경비를 선주가 상당부분 부담하고 있어서 사실상 선주가 운항관리자를 고용해서 쓰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런 구조로는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 운항관리자를 해운조합에서 독립시키자는 주장이 학계에서 수 차례 제기됐지만 조합이나 해수부가 전혀 듣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운항관리자는 “자신들이 월급을 준다는 인식 때문에 선주들은 운항관리자를 자기들 피 빨아먹는 놈들로 본다”며 “과적 때문에 출항정지를 시키기라도 하면 선주로부터 한 소리 들은 선장이 운항관리자들의 멱살을 잡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방 도서 같은 한직으로 발령 받는 걸 각오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선박을 점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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