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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개조’와 ‘위로부터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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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개조’와 ‘위로부터의 개혁’

입력
2014.06.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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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국가개조가 국정개혁과 함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국가개조에서 ‘국가’의 범위다. 시민사회에 대비되는 의미의 국가인지, 주권 영토 국민을 뜻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양쪽을 모두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대국민담화에서 국가개조, 정부조직 개편과 관피아 척결 및 공직사회 개혁 등의 과제를 제시했다. 현충일 추념사에서는 국가안전관리 시스템의 대개조와 공공개혁,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도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국가개조는 정부 사이드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개조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문제는 국가개조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편의적으로 이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용어 자체가 추상적인 거대담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개조가 관피아 혁파, 공직사회 개혁 등의 과제와 동일한 층위의 의제인지, 관피아 혁신 이상의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개념 설정도 필요하다. ‘규제는 암덩어리’ 라는 명제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는 그릇된 규제 완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가.

둘째 국가개조와 국정개혁이 진행되는 방식의 문제다.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면 어차피 정권과 정부가 주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집권세력과 관료에 의해 기획되는 대한민국 전체의 개조는 상정하기 어렵다. 또 쫓기듯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국가를 개조한다면서 한두달 만에 성과를 내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당위의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개조가 성공하려면 시민사회와의 소통에 입각한 동의와 참여가 전제될 때 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권위주의 시대 관이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의 낡은 모델의 잔영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관을 개혁하는데 시민사회의 동참을 위한 방법론과 숙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속도와 효율, 성장 위주의 사고방식이 국가적 재난의 기저에 깔려 있다는 진단에 동의한다면 사회 갈등구조를 관리하는 시스템의 개혁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수평적 거버넌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국가개조의 추진방식에서 시민사회와의 논의나 공감대를 충분히 형성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다.

셋째 여야 정치권과의 소통이다. 청와대가 국가개조의 컨트롤타워가 된다 해도 개조나 혁신은 국회의 동의 없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조직법 개정과 공직자윤리법ㆍ특별법 제정 등 외형적인 제도적 개선에 필요한 법령의 제·개정만 수십건에 달한다. 야당의 협조는 물론 여권내에서의 합의가 절실한 이유다. 6·4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의 위기를 면한 것은 ‘박근혜 지키기’ 선거전략이 주효했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이는 새누리당에 대한 청와대의 일방적 우위의 지속을 예고한다.

집권당과 내각은 대통령의 지시와 방향에 순치돼 거수기 노릇을 하고, 또 다시 7·30 재보선에서 ‘박근혜 마케팅’에 의존하려 하는가. 새누리당 지도부 스스로 국가개조라는 어젠다의 구체적 방향에 대한 의견을 청와대에 적극적으로 개진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개조의 철학과 방향에 대한 권력 내부의 치열한 토론을 들어본 적이 없다. 청와대가 여당을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는 위계적 개념으로 인식하거나 야당을 적대적 관계로 파악하는 순간 개혁은 추동될 수 없다.

6·4 지방선거에서 집권측은 개혁에 필요한 권력의 최소한의 수입(收入)은 확보했다. 수입에 맞게 권력을 지출해야 한다. 수입을 넘는 지출은 경제와 정치 공히 파산을 초래할 뿐이다. 국가개조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정치적 어젠다가 돼서는 안된다. 경제민주화를 공약했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선거 승리를 위한 어젠다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의 지체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불러 왔다는 역사적 경험이 그리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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