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광장 주변 철통 검색
지난주부턴 지하철역서 몸수색 "기차가 비행기냐" 불평 시민도
통제된 도로엔 무장 순찰차만...
집회·인터넷 원천 봉쇄
베이징 거주 민주 인사들에 "당분간 여행 떠나라" 통보
광장서 인증샷 찍어 올려도 연행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은 개혁파 후야오방 서거 계기로 학생·시민 "민주화" 대규모 시위
中정부가 軍 동원해 무력 진압 희생자 300-2600명 추정
1일 오전 10시 중국 베이징(北京)시 지하철 1호선 톈안먼(天安門) 동역. 역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일일이 가방을 검색대에 올려 놓은 뒤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지하철을 탈 때 가방 검사는 늘 있는 일이지만 지난달 26일부터 몸수색까지 더해졌다. “지하철이 무슨 비행기냐”며 불평하는 시민도 있었다.
D출구로 나와 톈안먼 광장 쪽으로 걸으니 평상시 같으면 차로 가득 했을 광장 동측로가 텅 비어 있다. 지난달 31일부터 광장을 둘러싼 편도 5차로 도로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텅 빈 길을 순찰차만 쉴새 없이 지나갔다. 특히 지붕이 없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탄 무장경찰 6명은 군복을 차려 입고 철모를 쓴 채 긴 총까지 들고 있었다.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길을 건너야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길을 건너자 다시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서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모두 몸 검색을 한 뒤 보내기 때문에 20여분이 걸려서야겨우 광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나마 동쪽에서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빠른 편이다. 서쪽에서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100m도 넘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사진기를 꺼내 이 장면을 찍자 곧바로 경찰이 다가와 “방금 뭘 찍었느냐”고 캐물은 뒤 사진의 삭제를 요구했다.
톈안먼 25주기 앞두고 삼엄한 경비
톈안먼 광장의 검문이 강화된 것은 사흘 후인 톈안먼 민주화 운동 25주년(4일) 때문이다. 위구르 분리 독립 운동 세력의 잇따른 테러로 중국 당국에 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좌절된 민주화의 상징적인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은 일요일인데다 단오절 연휴(5월 31일~6월 2일)까지 겹쳐 인파가 더 많았다.
중국 당국은 ‘6ㆍ4 사건’ 25주년을 앞두고 일찌감치 철통 검색 및 시위 원천 봉쇄 작전에 나섰다. 당시 학생들 시위에 동조한 ‘경제학주보’(經濟學週報) 부편집장인 여성 언론인 가오위(高瑜ㆍ70)는 지난 4월 체포됐다. 지난달 초 베이징의 한 가정집에서 열린 6ㆍ4 기념 토론회에 참석했던 인권 변호사 푸즈창(浦志强)과 반체제 인사 후스건(胡石根)도 공공질서 문란죄로 수감됐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민주 인사들은 ‘당분간 여행을 떠나라’는, 반대로 지방 인사들은 ‘4일까지 베이징에 갈 수 없다‘는 경찰의 통보를 받았다.
톈안먼 광장에서 손가락으로 V자 모양을 하고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한 네티즌도 연행될 정도다. 웨이보(微博ㆍ중국판 트위터)에서는 ‘광장’이란 단어만 들어가도 검색이 제한되고 있다. ‘톈안먼’이나 ‘6월 4일’을 입력하면 ‘관련 법률과 법규, 정책에 따라 그 결과를 보여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뜬다. 한 소식통은 “매일 당국에 붙잡혀 가고 있는 인사들의 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들은 톈안먼 사건 재평가가 중국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임을 확인시켜 준다. 당시 무력진압을 반대하다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막내 아들 자오우쥔(趙五軍)이 최근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중국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16일 “1980년대 정치적 풍파와 관련, 중국 정부는 이미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고 답했다. 반체제 작가 위제(徐傑)는 최근 해외 중문 매체와 인터뷰에서 “중국은 매년 7,000억위안(115조원) 이상을 사회 질서 유지 비용으로 쓰고 있다”며 “민주화 인사의 잇따른 구속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독재자적 면모를 보여준 것으로 더 이상 그에게 환상을 가져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는 사이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25년 전의 이 기념비적인 민주화 운동은 어렴풋한 과거가 돼 가고 있다. 이날 톈안먼 광장에서 만난 대학원생 청징(程靜ㆍ27)씨는 “요즘 대학생은 일자리 구하는 게 가장 큰 관심사여서 사회문제나 정치개혁에는 시큰둥하다”고 말했다.
그때 톈안먼에서 무슨 일이
1989년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으로 촉발됐다. 78년 개혁개방 이후 빈부확대와 물가상승, 관료부패 등 누적된 불만이 민주 정치 요구라는 학생들 시위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막후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87년 초 강제로 쫓겨난 개혁파의 상징 후야오방의 서거 소식은 학생들을 자극했다. 이날 밤 베이징에는 그를 애도하는 대자보가 나붙었고, 다음 날부터 톈안먼 광장엔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부 시위자는 재산 공개 등을 요구하며 당 최고 지도부의 집단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 진입까지 시도했다.
4월 22일 후야오방 추도회 당일엔 20여만명이 톈안먼 광장에 운집했다. 개혁파인 자오쯔양 총서기가 방북으로 베이징을 비운 사이, 보수파인 리펑(李鵬) 총리는 덩샤오핑의 재가 아래 4월 26일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서 “학생 시위는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제도를 전복하기 위한 계획적인 음모이자 ‘동란’”이라고 공격했다. 이 사설은 오히려 학생과 시민을 더 격분시켰다.
4월 30일 북한에서 돌아온 자오쯔양은 문제의 사설을 당장 취소할 것을 대안으로 내 놨으나 덩샤오핑에 의해 거절당했다. 자오쯔양은 “민주 정치를 추진하고 부패 관리를 처벌하란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우리 당의 주장”이라며 학생들의 손을 들어줬다. 5월 13일 학생 1,000여명의 단식이 시작되자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불러 이틀 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방중하기 전까지 광장을 깨끗이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위대 규모는 100만명 이상으로 더 늘어났다. 중소 화해를 위해 베이징을 찾은 전세계 언론은 이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덩샤오핑은 고르바초프가 돌아간 직후인 5월 17일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를 소집해 계엄 선포와 군대 동원을 결정했다. 이에 반대했던 자오쯔양은 사직을 결심한 뒤 5월 18일 새벽 톈안먼 광장으로 학생들을 찾아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며 단식을 끝낼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5월 19일 탱크와 장갑차가 베이징 근교로 진입하자 시민들이 이를 저지했다. 군은 일단 물러났다. 열흘 뒤 자유의 여신상을 본 뜬 민주 여신상이 톈안먼 광장에 세워졌다. 그믐밤을 기다리던 군은 6월 3일 토요일 오후 베이징의 동서남북에서 출발, 자동소총 등을 쏘며 진격했고 6월 4일 새벽 1시 톈안먼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불과 3시간 40분 뒤 광장에는 단 한 명의 시위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진압 과정에서 200여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최소 300명에서 많게는 2,600명까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민주화운동 주역 다수 미국행
당시 ‘톈안먼 광장 보위 지휘부’의 총지휘자로 “죽을 각오로 톈안먼을 지키고 베이징을 지키고 공화국을 지키며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선언했던 차이링(柴玲ㆍ48)은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의 이른바 ‘참새작전’으로 홍콩으로 건너간 뒤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후 하버드대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소프트웨어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지난 2010년에 기독교에 귀의한 뒤 시위를 무력 진압한 당시 지도부를 용서한다는 글을 2012년 발표했다 다른 학생 지도자로부터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학생으로 ‘톈안먼 광장 보위 지휘부’의 부지휘자였던 왕단(王丹ㆍ45)은 학생 수배자 명단 첫 줄에 올라 체포됐다. ‘반혁명선전선동죄’로 4년형을 살고 나와 시민 상서(上書)운동과 인권운동 등을 하다 95년 다시 정보전복음모죄로 11년형을 선고 받았다. 98년 국제 여론에 힘입어 조기 석방된 뒤 미국으로 추방된 그는 하버드대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은 뒤 대만 칭화(淸華)대에서 중국현대사를 강의하고 여러 권의 책도 냈다. 지금은 다시 미국으로 가 있다.
위구르족 출신으로 당시 리펑 총리와 격론을 벌이는 장면이 TV로 생중계돼 유명해진 학생 지도자 우얼카이시(吾爾開希ㆍ46)도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수배자 명단에 오른 뒤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현재 대만에서 정치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최근 AFP 통신과 인터뷰에서 “그들은 대화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군대를 동원했다”며 당국의 강경 진압을 비판했다.
계엄 선포와 군대 동원을 지시한 덩샤오핑은 97년 사망했다. 강경 진압에 반대하다 총서기에서 밀려난 자오쯔양은 이후 가택연금 당하다 2005년 숨졌다. 학생들을 격분시킨 4월 26일 인민일보 사설을 주도하며 강경 대응을 주장한 리펑은 98년까지 총리를 지냈고 건재하다. 최근 가족의 비리 의혹이 잇따라 불거져 곤혹스런 상황이다.
베이징=글ㆍ사진 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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