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고 성폭행 당한 뒤 고속도로서 차에 치여 숨져 성폭행 혐의 스리랑카인 증거부족으로 무죄 판결 "특수강간은 공소시효 끝나 특수강도강간죄 적용 강도 물증·진술 확보 못해 DNA 증거는 판단 안해" 檢 부실수사 논란, 항소방침
15년만에 성폭행범이 잡혀 원통한 죽음의 한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됐던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에 무죄 판결이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청와대 민원 끝에 재수사에 착수한 대표적인 국민과의 소통 사례로 들었지만, 증거부족으로 무죄 선고가 남에 따라 부실수사 논란이 일고 있다.
대구지법 형사12부(재판장 최월영 부장판사)는 30일 귀가 중인 여대생 정모(당시 18세ㆍK대1년)양을 끌고 가 금품을 빼앗고 성폭행한 혐의(특수강도강간 등)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이 구형된 스리랑카인 K(48)씨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증거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별도로 기소된 무면허운전과 강제추행혐의 등에 대해서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고 120시간의 사회봉사와 3년간 전자발찌 부착 등을 명령했다.
1998년 10월 17일 오전 대구 구마고속도로에서 덤프트럭에 치어 숨진 정양은 속옷이 벗겨진 상태였고 속옷에서 정액이 검출됐는데도 단순한 교통사고로 처리됐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고 2011년 다른 성범죄에 연루된 K씨의 DNA가 정양의 속옷에서 검출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 진실이 밝혀지는 듯했다. 검찰은 K씨 등 스리랑카인 3명이 술에 취한 정양에게 술을 더 먹인 다음 자전거에 강제로 태워 구마고속도로 굴다리로 끌고 가 지갑 속의 학생증과 현금, 책 등을 빼앗은 뒤 다른 2명이 망을 보는 사이 차례로 성폭행한 혐의로 K씨(공범 2명은 스리랑카로 출국)를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공소시효 15년인 특수강도강간 혐의에 대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입증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특수강도강간은 강도가 성폭행을 한 것인데, K씨 등의 강도 짓 여부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K씨는 성폭행을 뒷받침하는 DNA 증거조차 재감정을 요구하며 “현장에 간 사실조차 없다”며 범행을 부인해 왔다.
검찰이 K씨 등이 강도 짓을 하면서 성폭행했다고 제시한 증거는 스리랑카로 되돌아 간 공범 중 1명이 지인에게 했다는 전언이 사실상 유일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워낙 오래 지나 강탈한 학생증이나 현금, 책 등 물증은 확보할 수 없었다. 재판부는 제3자가 전달한 ‘전문진술’도 경우에 따라 증거능력을 가질 수 있지만, 검찰이 제출한 해당 진술이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특신상태’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별다른 자료가 없어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공범의 직접진술이나 특신상태의 전문진술이 절실했지만, 검찰은 최근에야 스리랑카 현지에서 기소중지한 공범의 신병이 확보됐다는 소식에 따라 수사관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번 재판에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특수강도 특수강간 강도강간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10년)가 지났다는 이유로 면소를 선고했다. 공소시효 10년인 특수강간죄도 DNA가 확보돼 있으면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시효가 10년 연장되지만, 이번 사건은 2010년 4월 특례법 시행 당시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게 됐다.
대구지법 이종길 공보판사는 “특수강도강간은 시효가 남았지만 증거부족으로 무죄, 특수강도 등은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DNA 증거 등에 대한 실체적 판단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16년동안 생업도 팽개친 채 딸의 죽음에 매달려온 정양 아버지 정현조(67)씨는 “억울하다”며 증거은폐 등에 대한 재조사를 촉구하겠다고 밝혔다. 정씨는 “검찰이 내가 축적한 증거자료를 무시했다”며 “사건발생 당시 수사담당자와 트럭운전사 등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씨는 딸의 죽음 직후부터 증거를 수집하고 경찰 검찰 청와대 등에 진정을 하며 진실 규명에 매달렸다.
검찰은 법리검토를 거쳐 항소할 방침이다.
대구=정광진기자 kjche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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