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묵 서울대 인문대 국문학과 교수
최근 변화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전통시대 변(變)과 화(化)는 구분하여 쓰이기도 하였다. ‘변’은 새것과 옛것이 함께 섞여 있는 상태로 조금 바뀐 것을 이르고, ‘화’는 예전의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만 남는 것을 이른다. 요즘 같으면 세상은 ‘변’ 정도가 아니라 ‘화’의 개념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옛글을 읽다가 변화에 대한 글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18세기 조경(趙璥)이라는 문인이 그의 장인 이천보(李天輔)가 응봉동 강가에 지은 집에 붙인 육화정기(六化亭記)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조경은 변화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대개 만물 중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모두 조물주가 변화하게 만든 것이다. 조물주가 변화시키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은 변화 중에서 좋은 것이다. 이제 저 초목은 지각이 없어도 싹이 트고 무성하다가 시들어 떨어지기도 하며 썩어 반딧불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날짐승이나 길짐승, 벌레, 물고기, 조개 등 기의 작용으로 움직이고 지각을 갖춘 존재가 변화하는 것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변화를 당할 때 모두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니, 이는 조물주가 변화를 시킨 것이요 스스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사람도 또한 그러하다. 태어나서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졌다가 늙어 허옇게 바뀌어 죽게 되는데 그 사이 변화하지 않는 것 없으니, 식물이나 동물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 다만 그 지각이란 것이 허명영묘(虛明靈妙)하여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뜻만 크고 거칠기만 한 자도 변화하여 성인이 되고 능력이 시원찮은 자도 변화하여 현인이 되기도 한다. 중용에서 ‘어리석은 사람도 반드시 밝아지고, 유약한 사람도 반드시 강해진다.’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조물주의 변화를 빼앗아 스스로 변화를 창출한 것이라 하겠다. 변화가 자신으로부터 나오면 그 자신만 변화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국가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거대한 천하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변화시킬 수 있다.”
천지 만물 중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그 변화는 조물주의 힘에 의하여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요,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 역시 다르지 않아 조물주의 뜻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변화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변화가 좋은 변화라 하였다. 주체적인 의지에 의한 변화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국가, 천하를 바꾸는 데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좋은 변화를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중용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밝아지고 유약한 사람이 강해지기 위해서 “남이 한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이라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이라도 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천보의 집 이름 ‘육화’는 육십화(六十化)를 줄인 말로, 춘추시대 거백옥(?伯玉)이라는 사람이 예순의 나이가 될 때까지 육십 번이나 잘못된 점을 고쳤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나이가 들어서도 끊임없이 잘못을 고쳐 변화하고 이를 사회와 국가에까지 확충하는 것이 ‘육화’의 정신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옛글에서 변화를 강조한 글이 참으로 많다. 대학에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욕조에다 새겨두었다는 “진실로 날로 새롭게 하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해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는 구절, 그리고 “백성을 진작하여 새롭게 한다(作新民)”는 서경의 구절과 “주(周)는 낡은 나라지만 그 천명이 새롭다.”고 한 시경의 구절을 나란히 인용한 대목이 있다. 그 뜻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었지만 대체로 임금이 새로워지면 백성도 절로 새로워지고 그렇게 되면 나라도 새로워진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나라를 바꾸기 위해서는 위정자의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를 위해서는 남들보다 백 배 천 배 노력을 더하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변화에 대한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육화정기에서 배울 ‘육화’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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