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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남아공 다가갈수록 빠져 들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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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남아공 다가갈수록 빠져 들고 마는...

입력
2014.05.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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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없는 게 없는 나라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닌 천혜의 조건 중 당당히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건 일조량이다. 하루 평균 9시간 30분. 그 태양빛 아래 사람도, 동물도, 산과 바다도 모두 아름답게 빛난다. 테이블마운틴의 정상 풍경.
이것저것 없는 게 없는 나라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닌 천혜의 조건 중 당당히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건 일조량이다. 하루 평균 9시간 30분. 그 태양빛 아래 사람도, 동물도, 산과 바다도 모두 아름답게 빛난다. 테이블마운틴의 정상 풍경.

‘무지개의 나라.’ 넬슨 만델라의 어록에 뭉뚱그려 쓸려 들어가기 일쑤지만 이 표현의 저작권은 사실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에게 있다. 어쨌거나. 다양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개념이다. 사바나의 토테미즘에서부터, 정작 유럽에선 흔적을 찾기 힘든, 네덜란드 민족주의까지 하나의 국경선 안에 존재한다. 그건 여행자로 이 나라에 발을 디뎠을 때, 다른 곳에서 경험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대해도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위 22도에서 36도 사이, 동경 16도에서 33도 사이. 거기 지구의 절반쯤이 한 데 섞여 있는 듯한 무지개의 영토가 있다. 여기 쓰는 건 그곳에서 밟아본, 꽤나 색깔이 다른, 그러나 한 데 어울려 있는 무지개의 두 조각에 관한 이야기다.

슐룰루웨 임폴로지 게임 리저브의 새벽
슐룰루웨 임폴로지 게임 리저브의 새벽

콰줄루 나탈, 전사와 야생의 땅

29년 전 메릴 스트립을 찾아간 로버트 레드포드의 짐보따리엔 와인과 장총 세 자루, 한 달 치 일용품, 그리고 축음기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레코드가 들어 있었다.(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그래서일까. 적도 이남 아프리카 사바나는 어딜 가나, 고적하고 장엄한 로망스가 흘러 넘치고 있는 거라는, 도도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콰줄루 나탈주(州)의 중심지 더반은 현대화한 대도시였다. 고층빌딩, 코카콜라와 삼성 광고판, 파도타기를 즐기는 젊은이들…. 매력적인 활기가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보자고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탄 건 아니었다. 차를 빌렸다. 인도양의 파도를 오른쪽에 두고 북쪽으로 달리길 한 시간 남짓. 사바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바나는 열대 우림과 사막 사이의 초원 지대를 일컫는다. 지구본을 거꾸로 엎어 놓고 보면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 꼭지에 씌워 놓은 고깔모자처럼 생겼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기 직전, 두 바다는 양쪽에서 서로 다른 영향을 이 나라에 미친다. 그래서 면적에 비해 기후의 편차가 크다. 서쪽은 타오르는 태양 아래 모래바람만 날리고, 동쪽은 비교적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는 사바나다. 콰줄루 나탈은 동쪽에 속한다. 이곳은 본래 줄루족의 땅이다. 자발없이 영어책을 베껴서 만든 가이드북엔 콰줄루 나탈이라는 명칭 대신 ‘줄루랜드’라고 표기된 것도 있을 것이다. 모쪼록 가이드북은 가려서 보시길.

줄루족은 케냐의 마사이족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용맹한 부족으로 꼽힌다. 18세기 샤카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합하고 유럽 침략자에 맞서 싸웠다. 그는 자신의 피붙이마저 가차없이 도륙한 잔혹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러나 긴 억압의 역사에서 벗어난 줄루족의 자긍심을 드러낼 존재로, 그는 지금 부지런히 호명되고 있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더반에 새로 만든 공항의 이름도 ‘킹 샤카’. 모잠비크 국경이 가까워질수록 거리엔 샤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간판이 많아졌다. 샤카의 고향인 에쇼웨 근처 민속촌에서 줄루족의 생활을 접해볼 수 있었다. 재연해서 보여주는 그들의 전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 14%가 붙은 ‘인보이스’를 내민 전사의 후예 얼굴에는, 유럽 문화에 순치돼버린 서비스 마인드가 깃들어 있었다. 그게 아쉬웠다.

게임 리저브 투어는 자동차를 주로 이용하지만 걸어서도 가능하다.
게임 리저브 투어는 자동차를 주로 이용하지만 걸어서도 가능하다.

“자연이요(It’s nature).”

더반에서 출발해서 대략 300㎞. 예약해 둔 로지(방갈로 형태의 별장형 숙소)에 도착했다. 드디어 사바나의 야생 한복판. 흡-. 열대 과일의 껍질을 벗겨 놓은 것 같은 기분 좋은 냄새가 공기의 입자에 묻어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로지에서 향을 쓴 줄 알고 물었더니 그냥 자연에서 나는 냄새란다. 값비싼 웰컴 드링크보다 훨씬 반가운, 아프리카 대자연의 환대였다.

남아공에선 사파리라는 말보다 ‘게임 리저브(game reserve)’라는 용어가 흔하다. 게임은 원래 사냥감이라는 뜻. 국립공원뿐 아니라 개인이 소유한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곳곳에 있는데 게임 리저브는 사영 보호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아공 동부의 광활한 사바나에 게임 리저브들이 겹쳐져 있다. 그 안에서 동물들은 자유롭게 살아간다. 인위적으로 먹이를 주거나 교배에 간섭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게임 리저브는 엄연한 사유지라서 철조망으로 경계가 구획돼 있다. 말하자면 거주와 이전의 자유가 제한된 야생. 하지만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여행자가 철조망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동물을 보호하면서 사람의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일종의 절충이라고 할 수 있다. 찾아간 슐룰루웨 임폴로지 게임 리저브의 면적은 약 960㎢. 서울의 1.5배 정도 되는 크기다.

“저게 마룰라라는 나무예요. ‘아프리카의 영혼’으로 불리는 거죠. 스펠링은 엠, 에이…”

사륜구동 랜드로버는 오전 5시 45분에 출발했다. 드라이버 겸 레인저(게임 리저브의 가이드)는 줄루족 남자였다. 사바나의 동식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훌륭한 영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철자법엔 서툴렀다.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게임 리저브 투어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해 뜨기 전후의 이른 아침. 잠에서 막 깬 동물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시간이다.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살아가는 곳이지만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단연 ‘빅 파이브’. 사자, 표범, 코끼리, 코뿔소, 버펄로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맹수들을 일컫는 말이다. 투어에 나선 아침, 그 중 셋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사냥하듯 카메라로 그것들을 쫓는 것보다는 뚜껑 없는 랜드로버를 타고 달리며 맞는 바람이, 얽매임 없는 그 대기를 들이키는 게 좋았다. 사바나엔 코뿔소도 공기도 야생이었다. 나는 아프리카를 숨쉬고 있었다.

솟과 동물인 니알라 수컷.
솟과 동물인 니알라 수컷.

케이프타운, 검은 대륙 끝의 유럽

지중해를 닮았다.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햇살과 절벽 위에 지은 멋들어진 주택들, 고급 자동차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여유로운 표정의 사람들, 언덕에 울타리를 맞대고 이어진 와인 양조장들…. 음력으로 보름에서 이틀이 지난 15일 밤, 그런데 하늘의 달이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반대 방향에서 이울고 있었다. 이 도시가 적도 아래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낯선 천체의 풍경. 여긴, 케이프타운이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이래 유럽인들은, 흑인 정권이 출범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케이프타운의 중심부를 비운 적이 없다. 남아공 인구 중 백인 비율은 12%가 조금 못 되지만 케이프타운만큼은 되레 흑인이 소수다. 테이블마운틴 맞은 편의 콘스탄티아처럼 아예 유색인종은 찾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동네’도 있다. 이 도시는, 그래서 어쩌면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정책)의 마지막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유럽인 아니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을 뽑는 투표에서 늘 수위를 다툰다. 검은 야생의 대륙 끝에 붙은 지중해의 도시라니, 유럽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어찌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런 로망이 없는 대륙에서 온 여행자라도 상관없다. 케이프타운은 찾아오는 사람 모두가 기쁨을 안고 돌아가는 곳이다. 테이블마운틴 국립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해발 1,086m. 테이블마운틴의 높이다. 산은 해안에 바투 붙어 가파른 각도로 융기해 있어서 숫자의 느낌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그러나 테이블마운틴의 진짜 웅장함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에 있다. 트레킹으로 가든 케이블카를 타고 가든, 산에 오르면 평원에 가까운 드넓은 정상부가 눈앞에 펼쳐진다. 길이가 무려 3㎞에 이르는 평탄한 산의 꼭대기. 탁자(테이블)라는 이름이 이 산에 붙은 이유다. 넓은 산정을 산책하듯 거닐며 대서양의 둥근 수평선을, 거친 암릉의 호쾌한 출렁임을, 산의 발치에 붙어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도시의 건물들을 굽어볼 수 있다.

테이블마운틴 국립공원은 달랑 산 하나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케이프타운이 위치한 지형은 17억 년 전 바닷속에서 형성된 후 거의 지각 변동을 겪지 않았다. 약 1억 5,000만 년 전 이 땅덩이가 남아메리카 대륙과 분리되기 전의 모습과 거의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남아메리카 동쪽 해안과 이곳의 지형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땅덩어리 자체가 거대한 문화재인 셈. 도심지 워터프론트에 붙어 있는 시그널힐에서부터 테이블마운틴을 거쳐 12개(실제론 14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 트웰브 아파슬, 아름다운 해안도로 채프먼스 피크 드라이브, 아프리카 펭귄을 볼 수 있는 볼더스 해변, 땅끝 희망곶까지가 모두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그걸 한번 훑어보는 데만 2, 3일은 족히 걸린다.

에쇼웨 부근 민속촌 샤카랜드에서 재연 중인 줄루족의 전통 생활 모습.
에쇼웨 부근 민속촌 샤카랜드에서 재연 중인 줄루족의 전통 생활 모습.

“우린 늘 가운데 낀 존재입니다. 예전엔 백인이 위고 흑인이 아래였고, 지금은 그게 뒤집어졌죠. 하지만 우린 바뀐 게 전혀 없어요.”

케이프타운에서 나흘 동안 같이 다닌 드라이버는 무뚝뚝해서 개인적인 얘기를 물어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덩치가 커서 중부 아프리카 출신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술이 어떤 맛인지 상상도 못 한다는 말레이계 무슬림. 남아공에는 백인과 흑인을 제외한 유색인종도 꽤 된다. 주로 아시아계인데 인구 비중으로 따지면 백인과 비슷하다.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 컬러드(colored). 컬러드는 단순히 이민자의 집합이라기보다 고유의 문화를 가진 독립 계층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정치사회적 지위는 흑인에 가까웠으나 언어는 백인 지배층 말인 아프리칸스어(네덜란드어가 토착화한 남아공 언어)를 주로 쓴다. 비만 체형이 많다. 왜일까.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스레 물어봤는데 대답은 꽤 구조적인 내용이었다.

“컬러드는 여가 시간을 주로 먹는 데 써요. 과거 포도 농장에서 일하던 시절 백인들이 급료 일부를 와인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한 ‘토트’라는 제도의 유습이라고들 하죠. 컬러드가 백인이나 흑인과 섞여 즐길 만한 문화도 거의 없었고….”

희망곶으로 갔다. 희망봉이란 명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곶(cape)’이 정확한 번역이다. 케이프타운 여행의, 많은 사람에게 아프리카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땅끝. 바다는, 이곳에서 몸을 섞어 하나가 되는 거대한 두 대양은, 거칠고 아름다웠다. 희망이라는 범박한 말이 가파른 구체성으로 솟아오를 수 있는, 그래서 아연할 수밖에 없는 풍경.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의 말이 뒤섞여 그곳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란으로 들떠 있었다. 그게 이국적이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사실은, 아마도 내가 융합과 공존의 땅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에쇼웨ㆍ슐룰루웨ㆍ케이프타운(남아공)=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테이블마운틴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 360도 회전하면서 올라간다.
테이블마운틴 정상으로 가는 케이블카. 360도 회전하면서 올라간다.

가이드에게 가보고 싶다고 얘기하면 치안을 이유로 십중팔구 핀잔을 듣겠지만 타운십(흑인 거주지역)은,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가장 매력적인 풍경 중 하나다. 가난한 만큼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가이드에게 가보고 싶다고 얘기하면 치안을 이유로 십중팔구 핀잔을 듣겠지만 타운십(흑인 거주지역)은,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가장 매력적인 풍경 중 하나다. 가난한 만큼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여행수첩]

●한국과 남아공을 잇는 직항편은 없다.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 등을 경유해 간다. 남아프리카항공, 에미레이트항공, 싱가포르항공, 케세이퍼시픽 등을 이용할 수 있다. 홍콩을 경유할 경우 인천-홍콩 3시간30분, 홍콩-요하네스버그 13시간 정도 걸린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케이프타운과 더반은 각각 국내선으로 1시간 20분 정도 소요.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남아공의 화폐 단위는 란드(Rand)다. 환율이 역대 최저를 기록 중이라 지금이 남아공 여행의 적기라 할 수 있다. 1란드에 약 100원. 케이프타운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싸고 다른 지역은 한국에 비해 저렴하다. ●대중교통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그건 흑인의 교통 수단에 무관심했던 아파르트헤이트의 유산이기도 하다. 렌터카 인프라가 훌륭한 편이다. 대여료와 유가는 한국보다 조금 싼 편이지만 보통 운행 거리에 비례해 추가 요금(100㎞ 초과시 1㎞ 당 1.6란드 수준)이 있다. ●필아프리카(www.feelafricatour.co.kr)가 남아공을 중심으로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 특화된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 (02)3487-9095 남아공 관광정보 www.southafrica.net

케이프타운 워터프런트에서 공연 중인 마림바 밴드.
케이프타운 워터프런트에서 공연 중인 마림바 밴드.
파도타기는 남아공의 대중적인 스포츠 중 하나다.
파도타기는 남아공의 대중적인 스포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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