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출신 갈레아노
"현실도 나도 많이 변해 더 이상 읽을 가치 없어"
저서 '수탈된 대지' 부정
좌파 "스스로 엄격해진 것" 우파 "바보들 성서 잃어"
2009년 4월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미주기구(OAS) 정상회담장. 생전 돌출 행동으로 유명했던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책 한 권을 들고 일어섰다. 차베스는 3개월 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다가가 책을 건네고 악수를 나눈 뒤 기자들에게 “남미 역사의 기념비적 작품이자 우리에게 역사를 가르쳐준 책”이라고 자랑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을 비판해 남미 좌파의 성서처럼 여겨져 온 수탈된 대지다. 차베스 덕에 미국에서도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남미에서 40년 이상 반자본, 반미의 고전으로 통했다.
그런데 책의 저자인 에두아르노 갈레아노(73)가 최근 책의 내용을 스스로 철회해 미국 학계와 남미 지식인들이 혼란에 빠졌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갈레아노는 지난 달 책을 잘못 썼으며 자신은 책의 제목에 대해 논쟁할 자격도 없다고 말했다. 우루과이 출신인 갈레아노는 남미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축구 칼럼니스트다. 그의 다른 저서 거울 너머의 역사 불의 기억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탈된 대지는 남미에서 미 정부가 지원하는 우파 독재 정권들이 통치하던 1970년대 나왔다. 갈레아노는 당시 풍요의 땅이 오히려 침탈과 피침의 대상으로 전락한 남미 500년 역사를 정치 경제 사회의 방대한 자료로 기록했다. 이를 통해 남미의 만성적 가난과 저개발이 서구 식민주의자들과 이들의 대리인인 부자들의 수탈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갈레아노는 책 출간 이후 아르헨티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지만, 책은 좌파의 필독서가 돼 지금까지 10여개 국에서 100만권 이상 팔렸다. 원제는 라틴아메리카의 절개된 혈관들이지만 한국에서 수탈된 대지로 번역 출간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책이 아프리카, 아시아를 포함한 제3세계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그 같은 영향이 제3세계를 대표하는 중국 인도 브라질의 경제 성장 직전까지 계속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갈레아노는 지난달 브라질에서 열린 도서전에서 자신의 책이 더 이상 가치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도서전에서 마련한 수탈된 대지 출간 43주년 기념행사에서 “이 책은 정치경제 서적이 되고자 했다”며 “(하지만)자신은 그에 필요한 훈련이나 준비를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어낼 자신이 없다. (그러면)나는 졸도하고 말 것이다. 나에게 이 전통적 좌파의 산문은 극단적으로 무가치하며 용인할 수도 없다”는 말까지 했다.
갈레아노의 발언 이후 남미에서는 좌우파간 논란이 뜨겁다. 이 책을 교재로 남미 문제를 다뤄온 미국 대학들도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좌파들은 갈레아노의 발언이 책의 내용을 전면 부정한 게 아니라 작품에 대한 노작가의 엄격함과 철저함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우파인 쿠바 망명 작가 카를로스 몬타네르는 “바보(좌파)들이 자신들의 성서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남미 우파들은 그 동안 수탈된 대지를 ‘바보들의 성서’로 비웃고 자신의 가난을 남 탓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라고 비판해왔다.
갈레아노 자신은 책 내용을 부인한 배경에 대해 “현실이 많이 변했고 나도 많이 바뀌었다“며 ‘변화’를 이유로 들었다.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는 갈레아노는 “현실은 아주 많이 복잡하고 그 때문에 인간의 조건도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의 사회민주주의 조치를 높이 평가했지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좌파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갈레아노는 “좌파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종종 크나큰 실수를 한다”면서 쿠바 권력을 연이어 차지한 카스트로 형제와 차베스를 사례로 들었다. 갈레아노의 심경 변화를 두고 나이가 들어 보수적이 됐다거나 최근 심장마비와 암으로 투병한 후유증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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