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ㆍ최무룡 등 톱스타 출연 56년전 홍콩과 만든 첫 합작영화
지난해 3월 필름 발견했지만 음성 복원은 못해 무성영화로
응향효과 등 즉석에서 만들어 관객과의 더 많은 만남 기대
2년 전 미국 고전영화 ‘탐욕’(1924)을 본적이 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BFI(영국영화연구소) 사우스뱅크에서였다. BFI 사우스뱅크는 옛 영화를 보관하고 상영하는 일종의 시네마테크다. 100석 남짓한 극장 안의 스크린 앞 오른편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었다. 불이 꺼지자 연주자가 들어와 피아노 앞에 앉았고 스크린에 ‘탐욕’의 영상이 흐르자 연주를 시작했다.
‘탐욕’의 감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은 고집불통으로 유명했다. 등장인물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 하나를 위해 사막이나 다름없는 데스 밸리에서 두 달 동안 머물며 촬영했다. 스트로하임은 8시간짜리로 영화 편집을 마쳤는데 제작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영시간은 140분으로 오그라들었으나 화면 곳곳엔 스트로하임의 집념이 번득인다. 여느 영화와 달리 감독의 존재를 드러내는 크레딧에는 ‘연출된’(Directed by)이란 문구 대신 ‘개인적으로 연출된’(Personally Directed by)이라 새겨져 있다. 스튜디오의 가위질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영화는 오롯이 감독의 것이라는 스트로하임의 단단한 작가정신이 느껴졌다.
‘탐욕’은 현대인의 삶에 파고든 배금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성인데다 화면이 흑과 백으로만 이뤄졌고 감독의 메시지 전달 강박까지 있어 140분이 280분으로 느껴질 만도 했다. 시간은 빠른 물살처럼 흘렀다. 피아노 연주가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낡은 필름에 혼을 불어넣었다. 등장인물들이 격한 감정을 드러낼 때 연주자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바쁘게 내달렸고, 스크린이 애상에 젖을 때 피아노 리듬은 숙연했다. 찰리 채플린이 무성영화의 위대함을 역설하며 유성영화의 도입을 반대한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영화 관람이었다.
지난 22일 오후 유사한 경험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에서였다. 마주한 영화는 ‘이국정원’(1958)이었다. 충무로가 홍콩과 손잡고 만든 첫 합작영화이고 김진규, 최무룡, 윤일봉 등 톱스타가 함께했는데 오래도록 이름만 남은 작품이었다. 지난해 3월 홍콩에서 필름이 발견되며 실체가 확인됐다. 50년 넘어 빛을 봤지만 영화는 온전하지 못했다. 세월이 영상과 음성을 앗아갔다. 영상자료원의 복원과정을 거쳐 화질은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찾았으나 음성은 되찾지 못했다. 후천적 무성영화가 된 것이다.
복원된 ‘이국정원’은 이날 첫 공개됐다. 배우 다섯이 무대 한쪽에서 영상 속 인물들의 입에 맞춰 목소리 연기를 했고 새로 만들어진 노래도 불렀다. 국내 유일의 라틴음악밴드 라 벤타나가 스크린의 정서를 증폭했다. 음향효과를 담당한 연극배우 한 명이 무대 아래에서 구두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 등을 즉석으로 만들어냈다. 전계수 감독이 원래 시나리오를 4번 고쳐 쓰는 각색 작업을 했고 무대를 조율했다. 1960년대 후시녹음을 본뜬 코믹한 목소리 연기(‘별들의 고향’의 ‘경아 오랜만에 누워 보는군’ 같은 느끼한 성우 목소리를 떠올리면 된다)가 웃음을 불렀고 풍성한 사운드가 귀에 감겼다. 1950년대 후반 서울과 홍콩을 배경으로 한 두 남녀의 달콤한 사랑과 애절한 가족사가 독특한 형식미로 56년 만에 되살아났다. 음성 상실이란 치명적 결핍은 되려 매혹적인 요소가 됐다. 영상자료원은 공연과 영화 상영이 합쳐진 이번 행사를 ‘씨네 뮤지컬’이라 칭했다.
‘이국정원’ 행사는 단 세 차례 ‘공연’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내달 열릴 한 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해외도 찾을 생각이나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지난 1월부터 여러 스태프들이 힘겹게 손발을 맞춰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한 유쾌하고도 의미심장한 문화 행사인데 미래가 불투명하다.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려 더 많은 관객을 만나게 할 방법은 없을까. 2014년판 ‘이국정원’은 이벤트성 행사에만 만족하기엔 아까운 문화상품이다.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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