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탄생 100주년 기념 ‘낭독의 밤’행사 프랑스 문화원서
소설가·외교관·전쟁영웅… 자살로 끝맺은 복잡다단했던 삶 ‘밤은 고요하리라’에 담아
가상의 질문자와의 대담형식 작품 뒷이야기·쏟아진 비난 해명 포드·드골 등 유명인사 등장도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에 좋다는 박하차만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할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아직 어려서, 이 세상에 내가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26일 저녁 서울 봉래동 주한 프랑스문화원 대강의실에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로맹 가리 낭독의 밤’ 행사가 열렸다. 예를 갖춘 침묵 속에서 소설가 함정임씨가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도입부를 읽기 시작했다. 자기 앞의 생은 문단에서 퇴물 취급을 받던 노년의 작가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로, 엄청난 명성과 더불어 평생 한 번만 받는 공쿠르상을 두 번째 안게 만든 작품이다. 함 씨는 “어린 아이의 제한된 시각에 비친 세상과 인류의 지혜를 대표하는 할아버지가 본 세상이, 사랑이라는 하나의 줄로 엮이며 통하는 과정이 흥미롭다”는 말로 작품 선정 이유를 밝혔다.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로맹 가리의 인생은, 도무지 한 인간의 삶으로 보기 힘들만큼 복잡다단하다. 그는 전쟁 영웅이었고, 스타 작가였으며, 외교관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주재할 때는 할리우드와 연이 닿아 두 편의 영화를 찍었고 24세 연하의 여배우 진 세버그와 사랑에 빠져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재능과 혼란스런 사회상이 빚어낸 삶 속에서 그는 불행했을까, 행복했을까.
최근 출간된 자전적 소설 밤은 고요하리라(마음산책)는 이 물음에 대한 작가의 간접적인 대답이다. 죽기 6년 전 쓴 이 소설에서 작가는 대담 형식을 빌어 자신의 삶을 자세하게 풀어 놓았다. 그러나 대화는 모두 허구다. 질문자인 프랑수아 봉디는 실제로 작가의 오랜 친구지만 질문하는 이와 대답하는 이, 모두 로맹 가리 자신이다. 이런 장난을 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내세웠을 때처럼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유서에 자살의 이유를 ‘마지막 소설인 연과 밤은 고요하리라에서 찾으라’고 쓴 뒤 스스로에게 권총을 쏘았다. 사실상 유언장인 셈이다.
가상의 질문자 앞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쏟아졌던 비난을 해명하고, 작품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며, 스스로도 정의 내리지 못한 내면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답게 샤를 드골, 로널드 레이건, 어니스트 헤밍웨이, 존 포드 등 유명 인사들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심술궂은 작가는 결코 대중이 기대하는 우선 순위를 따라주지 않는다.
“비천한 짓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작가는 프랑수아즈라는 여자와 있었던 일을 꺼낸다. 스물 한 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가난뱅이인 자신에게 처음으로 몸을 허락했던 그와의 일을 페르노(알코올 도수 45도의 독한 술) 두 잔에 친구들 앞에서 떠벌렸던 이야기다. “(전투기 조종사로) 도시들을 폭격한 것이 훨씬 더 심각한 양심의 문제를 제기할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봉디(사실은 작가 자신)에게 로맹 가리는 답한다. “그 쿠르틀린(프랑스 극작가)식 추론은 대체 뭔가? 거 있잖나. ‘20수로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데 왜 내가 20프랑이나 주고 우산을 산단 말인가?’ 식 추론 말이네…평생 단 한 번 내가 스스로 정말 수치스러웠다고 판단하는 건 그날이었네.”
작가의 단단한 자아는 이런 식으로 읽는 이를 내내 기쁘게 한다. 누구보다 명성 있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소수자였고, 평단과 언론에 죽을 만큼 시달렸으면서도 위악에 빠지지 않았던 한 인간의 건강함이 문장 곳곳에 묻어 난다.
“내가 예술이나 문학의 몫으로 생각하는 유일하게 성스러운 의무는 진짜 가치들을 좇는 것이네. 작가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네…나는 청원을 하지도 않고, 깃발을 휘두르지도 않고, 행진을 하지도 않지만 내 뒤에는 항의하고, 시위하고, 청원하고, 호소하고, 외치고, 가리키고, 울부짖는 스무 권의 작품이 있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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