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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의 흥행 보증수표? 난 배우들에 묻어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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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의 흥행 보증수표? 난 배우들에 묻어갔을 뿐"

입력
2014.05.2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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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같은 삶의 모습이 계속 되리라는,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을 가감 없이 보이고 싶었던 거죠.”명륜당에서 박근형씨는 ‘청춘예찬’을 그렇게 말했다, 홍인기 기자 hongik@hk.co.kr
“저 같은 삶의 모습이 계속 되리라는,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을 가감 없이 보이고 싶었던 거죠.”명륜당에서 박근형씨는 ‘청춘예찬’을 그렇게 말했다, 홍인기 기자 hongik@hk.co.kr

그의 무대는 남루하다?

"비평가들이 붙인 선입견 비주류를 미화 없이 표현 정감 있다는 뜻으로 알아"

"영원한 청춘예찬"

청소년의 변화된 정서 등 현실에 맞게 연극을 손질 시대 문제 깨닫는 촉발점

무대에 연출이 안 보인다

"배우들의 이미지 남아야 관객들이 연극 무대 찾아 그래서 배우들 방목했죠"

폭풍처럼 젊음이 오가는 혜화역. 그 중 4번 출구 옆에는 보일락말락 붙어 있는 표지판 하나가 있다. “대명(大明) 거리. 이 거리는 젊음과 낭만이 숨쉬는 거리로서 조선조 시대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풍류 및 여가를 즐겼던 유서 깊은 거리이며 반촌(畔村)길이라 하였다.”멀지 않은 성균관대 구내에 조선 유학의 융성을 증거하는 집, 명륜당이 나온다.

거기서 조금 걸어 학교 정문을 나가 큰 길을 건너면 건물지하에 극단 골목길이 7년째 사무실로 쓰는 35평의 공간이 있다. ‘청춘예찬’을 필두로 ‘쥐’, ‘경숙이 아버지’ ‘대대손손’ 등 이들이 화제 속에서 펼쳤던 일련의 작품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극단의 대표이자 극작ㆍ연출가 박근형(50)의 경험과 극작술이 낳은 자식들이다. 그의 무대는 뮤지컬의 폭발적 증식 속에서 무대 미학의 진실을 보듬었다. 꾀죄죄한 무대지만 연극다운 연극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그의 무대에 “남루하다”는 딱지를 붙이고는 멀리서도 알은체를 한다. 어느덧 자신을 규정하는 용어처럼 돼 버린 말이지만 이제 어느 정도 객관화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평론가들이 내게 꼭 붙이는 지적이 ‘남루’하다는 말인데 그건 비평가들의 선입견이다. 구수하다, 정감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알겠다.”

그가 자신의 연극에 대해 내리는 정의다. .”한국말로, 한국말로, 한국 사람의 얘기를 미화 없이 한다.”그의 연극에 대한 마니아적 호평은 뒤집어 말하면 그 반대의 무대가 연극판을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을 정확히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열광이 결코 예외적 현상은 아니라는 데 본질이 있는 것이다. 복제 문화, 뮤지컬 등 이른바 시대의 총아들도 그의 무대 앞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헛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버릇처럼 그의 무대에는 한국 연극계의 ‘흥행 보증 수표’라는 표식이 함께 했다. 1998년도 한국일보 백상예술대상에서 희곡상ㆍ작품상을 거머쥐었던 ‘청춘예찬’은 더 거대한 후폭풍의 암시였다.‘청춘예찬’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촉발점이었다. 그 작품이 영원한 현재인 이유다.

“모두 다 알고 있는데도 무대화하지 않았던 것을 최초로 극화한 거죠. 비행 청소년들의 이야기지만 그 저류에 몰락한 소시민들의 꼬질꼬질한 삶을 가감 없이 무대화했거든요.”. 희망을 주자는 것도 아니었다. 서너 차례 시속의 흐름에 맞춰 조그마한 손질을 가했던 것을 뺀다면 우리의 삶이 10여년 전의 조건들에 여전히 포박돼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고야 말게 하는 무대다. “그 때는 청소년들이 밤새워 노는 걸 두고 일탈이라 했는데 이제는 아주 당연시됐잖아요. 청소년의 정서도 이젠 디지털화됐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시속의 흐름을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지를 따지고 있다. 매번의 무대는 그래서 그의 의식이 어떻게 현실과 조응하고 있는 가를 정확히 반영해 왔다.

반항끼 가득한 비행 소년을 섬뜩하게 연기한 박해일은 감독의 눈에 띄어 이제는 영화판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다. 윤제문, 고수희, 엄효섭 등 그 무대를 통해 개성적 연기를 보였던 배우들은 이제 영화ㆍ방송판의 섭외 1호들이다. .극단 골목길의 배우를 위한 메소드(연기술)이라도 있었던 걸까? “굳이 없어요.” 뭔가 잔뜩 기대를 하고 물으면 박근형은 또 김을 뺀다.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 혹은 무장 해제 시키는 그 독특한 화법에 걸려들면 직수굿하게 함께 가는 것이 상책임을 알게 된다.

“정규 연영과를 나오지 못 한 저는, 정말 연극이 좋아서 이 판을 못 떠나는 야전적인 친구들과 자연히 작업을 함께 하게 됐어요.” 삶에서 체득된 본능적 연기를 그는 극단 배우들을 통해 방목했을 뿐이라 한다. 진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내지 않을 수 없도록, 그는 배우들을 말없이 추동했다. 이를테면 무위(無爲)의 연출이다.

그래서 다그쳐보았다. 무대에 연출이 안 보인다며. “그게 좋아요.”뭔가 그럴듯한 반론을 기대했던 쪽이 외려 머쓱해진다. “무대에는 (연출이 아니라)배우들의 이미지가 남아 있어야 관객들이 오거든요.” 연출의 카리스마란 게 자신에게는 없단다, “배우들에 기대서…, 거기에 묻어가는 연출이죠.“ 이 말을 하고는 스스로 멋쩍다 싶은지 실없이 웃기까지 한다.

그는 배우들에게 진정으로 자유를 준다. 평상시 배우들의 연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장의 비수가 있다. “(당신의 최고를)연습실에서 바로 바로 보여줘야 한다.”극단 골목길 특유의 유대와 응집력이란 그 같은 독특한 리더십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결국 서슬퍼런 칼날 위에서 굳게 연대해 온 것이다.

극단 골목길은 그래서 하나의 실질적 유기체로 버텨 온 것이다. 자기 능력을 발휘할 장을 만들어주고 방목하는 식이다. 조직과 자본의 시대, 박씨 자체가 어쩌면 반시대적일지 모른다. “연극의 질서에 묶여 해 온대로 한 것일 뿐이다. 안 맞아도 내 식대로, 눈치 안 보고 연극을 만들자는 거다.” 그의 미학은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배반하지 말자는 데서 나온다. “나는 비주류의 삶에 쭉 주목해 왔다, 내가 주류였던 적은 없다. 내가 경험했던 게 비주류였다.”

그는 현재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배우고 있다. 그러나 숨가쁘게 돌아가는 연극판은 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이 늦깎이의 바램을 번번이 좌절시켰던 터. 시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는 본능적으로 끌린다고 했다. 편중된 풍요와 점증하는 헛것들에 숨막힐 듯한 이 21세기. 좋은 희곡은 결국 시라는 명제를 화두처럼 잡아 두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해롤드 핀터의 ‘배신’ 같은 걸작들은 시라는 믿음이에요. , 오태석 선생의 작품들도 따지고 보면 4ㆍ4조의 리드미컬한 시 아녜요?”

그러던 박씨의 말이 결기를 띠기 시작했다“지금 한국은 비참하다. 왜 우리나라는 밑도 끝도 없이 이런가. 비참과 참혹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그는 천민적 한국의 욕망의 끝을 말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인지, 캄캄하다,” 그러면서 그는 ‘청춘예찬’의 선생이 제자들 앞에서 뇌까린 대사를 들려 주었다. “난 이 나라 포기다.”세월호를 박차고 나가던 그들도 말했을까. “우린 이 배 포기다”라고?

“옛날에는 훈육 때 반드시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다. 매 맞고 나서 걸을 때마다 아리게 해서 그 때마다 반성하라는 의미였다.” 오늘도 성균관대 안 명륜당(明倫堂) 앞 너른 마당에는 해설자가 올망졸망한 시선들 앞서 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5월의 눈부신 햇볕 아래서 학생들은 몸이 절로 뒤틀려 어느새 장난질이다. 그래도 해설자의 말은 이어진다. 멈추지 않을 박근형표 연극처럼.

장병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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