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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여린 원칙주의자… 삶의 책임을 가혹하고 고독하게 짊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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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여린 원칙주의자… 삶의 책임을 가혹하고 고독하게 짊어지다

입력
2014.05.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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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교사이자 이웃

아내와 2녀1남 둔 가장

27년간 윤리교사로 교단

매사에 원리원칙 “고지식”평

좋은 선생님이자 동료

엄격하지만 매 들 땐 눈시울

남들에게 싫은 소리 못해

교직우너 상 땐 운전자 노릇

세월호 학생 인솔 ‘마지막 책무’

구조된 후 죄의식 시달린 듯

가족 피하고 체육관 밖 배회

“모든 책임 지겠다”유서 남기고…

단원고 고 강민규 전 교감은 늦게나마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교사의 자긍심을 지키고자 했다. 그가 선택한 속죄의 방식은 책임에 비춰 과도했고 윤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고집은 세월호 참사 내내 어두웠던 풍경 가운데 드물게 밝은 빛이었다. 양지고 졸업앨범, 유족 제공.
단원고 고 강민규 전 교감은 늦게나마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교사의 자긍심을 지키고자 했다. 그가 선택한 속죄의 방식은 책임에 비춰 과도했고 윤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고집은 세월호 참사 내내 어두웠던 풍경 가운데 드물게 밝은 빛이었다. 양지고 졸업앨범, 유족 제공.

고인의 장례식이 열렸던 지난달 21일 새벽, 단원고 교정을 한 바퀴 돈 뒤 정문을 나서는 운구 차량. 연합뉴스
고인의 장례식이 열렸던 지난달 21일 새벽, 단원고 교정을 한 바퀴 돈 뒤 정문을 나서는 운구 차량. 연합뉴스

그는 ‘평범한’ 교사였고 이웃이었다. 남들처럼 공부해서 80년대 사범대를 졸업했고, 군대를 다녀온 뒤 곧장 교단에 서서 지난 달까지 만 27년 동안 학생을 가르쳤다. 아내와 2녀1남을 둔 가장이었고, 주말이면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막내와 헌책방을 다니며 좋은 책을 골라 읽게 하던, 다시 말해 좋은 아버지이고자 노력하던 사람이었다.

다만 책임감이 유별났고 매사에 원리 원칙을 따져 고지식하다는 말을 듣곤 했다고, 그와 가까이 지낸 이들은 하나같이 평했다. 물론 그가 돋보이는 업적을 남겼거나 공동체를 위해 표나게 헌신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2년 전 교감으로 승진해 지난 3월 새 학교로 부임했고, 한 달여 뒤인 지난 4월 16일 2학년 수행여행 인솔책임을 맡아 제주도 배편에 올랐다.

그 배가 하필 ‘세월호’였고, 하필 그날 침몰했고, 참사를 수습해야 할 모든 책임 당국은 철저히 무책임하거나 무능했다. 다행히 그는 구조됐으나, 불행히도 수많은 제자들은 구조되지 못했다. 그 모진 현실에, 그의 행운은 역설적으로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하지 못한 자신의 인솔 책임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하고 고독한 방식으로 짊어졌다. 이틀 뒤인 18일 오후 그는 모든 책임을 당신이 지겠다는, 이성적으로 보자면 딱하기 짝이 없는 내용의 유서와 함께 시신으로 발견됐다. 요컨대 그의 죽음은 평범하지 못했고,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고 강민규 교감. 향년 53세.

선배 교사인 경기 오산 매홀중학교 이관성 교장은 고인을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한 마디로, ‘융통성 없는’ 삶을 기렸고, ‘융통성 없는’ 마지막 선택을 원망하고 타박했다. “고인은 천생 교사였어요. 교과서 같은 사람…, 더군다나 윤리교사 아닙니까.”

부천여고 정민환 교장은 고인에 대해 “비록 후배지만 책임감 하나는 우러러볼 만한 교사였다”고 회고했다. “원곡고에서 교감-교무로 함께 근무하던 때였죠. 하루는 제가 신임하던 교사 20여 분께 전체 교사 100명 중 함께 근무하고 싶은 동료의 이름을 적어내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 명단에 가장 많이 올랐던 분이 고인이었어요.” 정 교장은 “내가 아는 고인이라면 참사 현장에서 자신만 살겠다고 나올 분이 아니다”라고 했고 “그렇게 구조된 뒤에는 누군가는 그 분을 지키고 보호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1961년 충남 보령의 남포 농협조합장을 지낸 강병록씨와 정기훈씨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서 중등학교를 마친 뒤 80년 한 공업계 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 이듬해 공주사범대 국민윤리교육과에 진학했다. 그의 꿈은 교사였다.

고인은 과묵하고 어른스러워 막내 같지 않은 막내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소신과 원칙에 대한 고집 때문에 ‘못 말리는’ 청년이었다고 한다. 대천중고 동창인 이관희씨가 들려준 일화다. “대학 때 친구들끼리 지리산으로 놀러 간 적이 있어요. 밤에 경남 산청 읍내에서 술을 마셨는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겁니다. 술김에 일행 중 누가 문 닫은 가게 앞 파라솔을 집어 들곤 쓰고 가자고 했어요. 다들 유쾌하게 동의했고 그렇게 몇 걸음 갔는데 그 친구는 꿈쩍도 안 했어요. 자긴 안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파라솔을 도로 꽂아놓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안 움직이겠다는 거였어요. 결국 우린 모두 비를 쫄딱 맞고 민박집까지 가야 했지요.” 동료 교사로 또 친구로 오랜 세월 함께 보낸 한 친구는 “편법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곤란한 문제로 상의를 하면 늘 원칙대로 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사장교(ROTC)였고, 장교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풀 먹인 삼베옷 같은 고인의 천성이 그런 선택을 하게 했을 것이고, 장교 출신 윤리교사로서의 일상이 또 원칙과 책임, 규율과 질서에 대한 고인의 집착을 더 굳건히 했을 것이다. 그는 엄한 교사였다고, 제자들은 회고했다. “좀처럼 웃지도 않는, 무서운 선생님으로 통했죠. 하지만 반 아이들에게는 의외로 자상하셨어요. 하루는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지 아침 조례 시간에 어두운 얼굴로 들어오셔선 저희를 물끄러미 둘러보시데요. 그러다 갑자기 웃으시며 ‘그래~, 니들 보면 기분이 풀린다’ 하시던 게 기억나요.” 대부고교 1학년 시절 고인의 학급 제자였던 이종욱(31 회사원)씨는 “교실에서 우신 적도 있다”고 말했다. “시골 학교라 지각생이 꽤 많았는데 선생님은 지각하면 꼭 벌을 주셨어요. 그 날도 한 친구가 늦게 왔는데, 선생님은 매를 들고는 한참 꾸중하셨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주꾸미 한 꿰미를 내밀며 ‘새벽에 아버지가 잡아오신 건데 이거 챙기느라 늦었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할말을 잃고 눈시울이 붉어지셨어요. 잠깐 그러고 계시더니 ‘그래도 벌은 받자’고 하시며 자 같은 걸로 발바닥을 때리셨어요.”

고인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은 고인의 엄한 면모나 고집 센 원칙주의자라는 평가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학교에선 어땠는지 모르지만 속으론 아주 여린 친구였어요. 엄한 척하고 딱딱하게 굴었다면 그건 학생들을 통솔하기 위해서였을 거예요.” 대학 동창이자 동료 교사인 한 지인은 “관리자로서 후배 교사에게 싫은 소리를 한 날은 술 먹자고 청해선 마음 아프다며 하소연을 하곤 했어요. 성질이 좀 급해 불쑥 화를 낼 때도 있었고, 책상 앞에 忍(참을 인)자 세 개를 써 붙여두고 지낸 적도 있죠. 선배든 후배든 동료 교사에게 싫은 소리 아쉬운 소리 못해서 부장 시절에도 결원이 생긴 학급 담임을 맡기도 했어요. 교직원 상(喪)이라도 나면 교감 된 뒤로도 자기 차를 몰고 동료들 태워 다니는 게 일이었어요. 교감 되면 좀체 운전 안 하거든요. 그 뿐입니까? 교사 모임 등산 모임 등등…, 고인이 꾸려가던 모임만 10개 가까이 될 텐데 대부분 총무는, 그 나이에도 그의 몫이었어요. 총무란 게 회비며 일정안내며 성가신 일이 많잖아요.” A4용지 한 장 앞 뒷면 빼곡히 채워 쓴 고인의 유서에는 “내가 관리하던 통장을 보고 OO모임, OO산사모 통장을 정리해서 돌려주세요”라는 당부도 들어있었다.

그가 원칙과 규정을 기계적으로 고집한 것 같지는 않다. 고교 입시날 교사에게는 관리수당이 지급되지만 행정직 사원에게는 수당이 책정되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 고인은 매년 자기 차로 시험지를 운반한 뒤 운송수당을 행정 직원에게 주곤 했다. 안산의 한 학교 행정직으로 일하는 그는 고인을 장지까지 배웅하기 위해 휴가까지 냈다. 그는 “아직도 불쑥불쑥 슬픔이 치밀고 눈물이 나곤 한다”고 말했다.

매년 추첨을 해서 신입생을 고르게 배정해도, 이상하게도 학교에 따라 학생들의 개성이 다르게 형성되곤 한다고 했다. 선입견이나 편견 탓일 수도 있지만, 어떤 학교는 말썽쟁이들이 많고, 또 어떤 학교는 깍쟁이들이 많고… 그런 식이라는 거다. 안산의 중등 교사들 사이에서 단원고는 ‘천사들이 모이는 학교’로 통한다. “안산에서 가장 착한 애들이라면 아마 전국에서 가장 순하고 착한 애들일 것”이라고 한 교사는 말했다. 교사에게 가장 큰 보람이 좋은 학생을 길러내는 일이라면, 가장 큰 복은 착한 제자를 만나는 일이다. 단원고로 전근을 가게 됐을 때 고인은 지인들의 축하를 받았고, 고인 스스로도 내심 흡족했을 것이다. 한 달 밖에 안 돼 낯선 학생들이라곤 하나 늘 다니던 수학여행이었고, 인솔 책임자라고는 하나 목숨까지 걸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리를 지키라는 세월호 승무원의 안내방송을 그도 들었을 것이고, 그 안내를 누구보다 철석같이 신뢰했을 것이다. 그가 나서서 담임 교사나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힘주어 말했다고 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고, 또 그의 책임에 벗어나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인솔 책임자였으나, 그 역시 수많은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배도 바다도 모르는 한 명의 승객일 뿐이었다.

고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구조됐는지 알 길은 없다. 그가 구조된 사실에 대한 윤리적 판단도 개인에 따라 엇갈릴 수 있다. 어쨌건 고인은 참사 당일 현장에서 헬기로 구조돼 인근 섬 서거차도로 옮겨졌다. 정신을 차린 뒤 직접 여객선을 타고 팽목항으로 나와 진도체육관을 찾아갔고, 진술이 필요하다는 전갈을 듣자마자 택시를 타고 목포해경의 합동수사본부에 출두해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그 이후 고인의 행적은 흐릿하다. 잠은 어디서 잤는지, 자기는 했는지, 밥은 챙겨 먹었는지 본 사람이 없다. 학부모들이 모인 체육관 실내에는 잘 들어오지도 못한 채 바깥을 배회하곤 했다는 목격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을 수도 있고, 어떤 모멸적인 표정에 고개를 숙여야 했을 수도 있다. 진술조서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그의 마지막 진실 앞에 우리는, 다만 침묵해야 옳을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총체적 실패의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 앞에서 자신에 대한 그의 심판은 이 사회의 평균적 심판보다 더 가혹했다는 점이다. 그의 마지막 자리는, 52년 동안 지탱해온 삶의 모든 원칙과 가치도, 참사의 모든 진실과 책임도 무의미해진, 오직 ‘살아 남은 인솔 책임자’라는 사실과만 대면해야 하는 모진 자리였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욕되다 여긴 행운을 던져 제자들 곁으로 다가섰고, 그럼으로써 책임윤리를 다하고자 했다. 그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 판단 역시 별개의 문제이고,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반문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자유죽음의 저자 장 아메리는 인간성과 존엄성의 돌이킬 수 없는 실패와 치욕의 상황을 ‘에세크(echec 체스에서의 외통수)’라 규정하고, 바로 그 인간성과 존엄성으로 에세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 자유죽음(자살)이라 옹호한 바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남은 자의 삶의 이야기인 한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정민환 교장은 “고인은 죽음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떠났다”고 말했다.

17일 오후 아내 이미희(49)씨와 장녀 나영(23)씨 등 가족이 진도로 내려갔던 날, 고인은 가족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영씨와는 시선조차 나누지 않은 채 아내에게 ‘왜 내려왔냐’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체육관 뒤꼍으로 슬금슬금 가시더군요. 따라 갔더니 ‘언제 올라갈지 모른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고 하셨어요.” 이씨는 “그렇게 5분도 채 못 되게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그날 밤 9시 50분께 진도체육관 단상 위에서 단원고 교장과 교사 10여명이 무릎을 꿇고 실종자 가족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본 게, 알려진 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인의 지갑 안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 “가족과 학교 학생 교육청 학부모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내용과 가족들에 대한 당부, 친구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구절 등이 편지지 앞뒤 면에 꼼꼼히 빼곡히 적혀 있었다.

“층간 소음을 염려해 4살짜리 아들에게도 야단을 칠 정도로 남에게 피해 주는 걸 못 견뎌 했어요. 함께 살면서 속상할 때도 있었고 부부싸움도 꽤 했지만, 늘 믿음직하고 존경스러운 남편이었어요.” 아내에게 남긴 유서의 존칭에 대해 묻자 이씨는 “나이가 든 뒤론 표나게 부드러워져서 근년에는 제게 존대를 했어요”라고 말했다.

“고1 설에 받은 세뱃돈으로 어떤 가방을 사고 싶어 아버지께 부탁을 드린 적이 있어요. 가장 가까운 매장이 인근 도시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진 냉정하게 ‘계획을 세워 직접 가서 사라’시더군요. 그 날이 제가 지하철을 처음 타본 날이었어요. 아버진 그날 저를 줄곧 따라 다니며 지켜주시면서도 한 번도 안 도와주셨어요.” 나영씨는 “그날은 야단 맞고 시험 보는 것 같아 무서웠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 아버진 제게 장녀로서의 책임감 같은 걸 가르치시려 했던 것 같다”고, “서둘러 가셔서 처음엔 야속했지만, 이제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유해를 충남 보령의 가족 납골묘에 임시로 안치했다. 시신이 모두 수습되고 모든 의혹이 풀려 바다가 잠잠해지면, 그래서 고인이 정말 고이 쉴 수 있는 날이 오면, 유언에 따라 일부나마 그 낯선 바다에 모시기 위해서라고 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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