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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어린이 먼저” 그의 명령은 서슬 퍼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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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어린이 먼저” 그의 명령은 서슬 퍼랬다

입력
2014.05.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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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역사 속에는 위기의 순간에도 끝까지 조타기를 놓지 않고 배를 지킨 전설의 선장들이 등장한다. 타이태닉호의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의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는 그의 시맨십(Seamanship)을 기리는 동상(위)이 서 있다. 한국일보
바다의 역사 속에는 위기의 순간에도 끝까지 조타기를 놓지 않고 배를 지킨 전설의 선장들이 등장한다. 타이태닉호의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의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는 그의 시맨십(Seamanship)을 기리는 동상(위)이 서 있다. 한국일보
'여성과 아이들 먼저'라는 명령의 시초가 된 버큰헤이드호 사고(오른쪽)는 침몰하는 배 속에서도 부동자세를 풀지 않았던 병사들 이야기가 유명하다.
'여성과 아이들 먼저'라는 명령의 시초가 된 버큰헤이드호 사고(오른쪽)는 침몰하는 배 속에서도 부동자세를 풀지 않았던 병사들 이야기가 유명하다.

끝까지 선교 지키며 배와 운명 함께

대참사에도 고향에 동상 건립 추모

1852년 침몰 영국 해군선박 세튼 선장

부하들에 단호히 ‘부동자세’지시

여성·어린이 우선 구조 전통 세워

1990년 오징어잡이배 유정충 선장

홀로 배에 남아 구조요청하다 사망

‘아덴만 영웅’석해균 선장도 유명

‘영화 같은 실화’로 대중에게 알려진 선장은 리차드 필립스 선장뿐만이 아니다. 망망대해에서 벌어진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의 안위보다 승객과 선원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 '캡틴 히어로'들은 수 없이 많았다.

1912년 북대서양을 지나던 중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타이태닉호의 스토리는 이미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배의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차가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조타기를 놓지 않고 끝까지 선교(선장의 지휘소)를 지켰다. 특히 그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태우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선장의 지시를 받은 승무원들은 구명보트에 달려드는 남자 승객들을 저지하기 위해 하늘에 권총을 쏘면서 여성과 어린이들의 탈출을 도왔다.

선장의 살신성인을 지켜본 선원들 대부분(693명)은 끝까지 배에 남아 승객들을 구조하다 타이태닉호와 함께 침몰했다. 탑승인원 2,224명 중 710명만이 구조(생존율 32%)된 대참사였고, 선장으로서 이 재앙의 책임에서 비껴갈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 그의 동상이 세워진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시맨십(Seamanshipㆍ뱃사람 정신) 때문이었다.

스미스 선장보다 60년 앞서 ‘여성과 어린이 먼저’를 명령한 선장도 있다. 185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이드호의 선장 시드니 세튼 대령이다.

당시 버큰헤이드호 탑승객은 630여명 이었지만, 구명보트 3척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은 180명 밖에 되지 않았다. 세튼 선장은 당시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우선 ▦군인들은 갑판 위에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배에 함께 올라탔던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 130명은 구명보트에 태우라는 명령이었다. 세튼 선장의 명령에 군인들은 끝까지 부동자세를 풀지 않았고 그를 포함한 436명의 군인들은 그대로 배와 함께 수장됐다. 실제로 타이태닉 호가 침몰할 당시 승객들과 선원들은 “버큰에이드호를 기억하라”는 말을 주고 받았다. 선장의 명령대로 여성과 어린이들만이라도 모두 구조하겠다는 의지였다.

세월호와 같은 조선소에서 건조돼 세월호가 청해진해운에 인수되기 전까지 같은 해운사에서 운행됐던 일본 아리아케호 역시 5년 전 침몰됐다. 여러 가지로 유사한 점이 많은 두 배였지만 결과는 판이했다. 2009년 승객 7명과 선원 21명을 태우고 와카야마 현 신구 시 앞바다를 항해 중이던 아리아케호는 새벽 5시6분 왼쪽 선미에 파도를 맞고 오른쪽으로 25도 기울었다. 선장은 곧바로 조타와 승객안내 등 각 선원에게 역할을 분담했고, 해상보안청에 헬리콥터 구조를 요청했다. 선원들은 선장 지시로 승객 전원을 갑판 쪽 통로로 이동시키고 구명조끼 착용을 확인했다. 7시4분 도착한 해상보안청 헬리콥터에 승객들이 먼저 구조됐고, 끝까지 배에 남은 선장과 승무원 6명은 10시21분이 돼서야 배를 빠져 나왔다. 철저히 매뉴얼대로 움직인 선장과 그의 지시를 따른 선원들 덕에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국내에도 전설적 선장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는 역시 ‘아덴만의 영웅’으로 알려진 석해균(61) 선장이다. 2011년 아덴만 인근 인도양 해상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삼호쥬얼리호가 피랍되자 당시 석 선장은 해적들이 총부리를 들이미는 상황에서도 해군의 구출작전을 돕기 위해 엔진오일에 물을 타거나 조타실에 이상이 있다고 해적들을 속여 여러 차례 배를 세웠다. 또 해적들의 규모와 무장상태, 선원들의 상황 등을 알리기 위해 몰래 해군과 교신했다. 결국 낌새를 알아챈 해적들의 총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넘나들었지만, 그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선원 21명은 모두 무사 구출됐다.

하나호의 고 유정충 선장 역시 시맨십을 발휘한 영웅으로 유명하다. 1990년 제주 서남쪽 370마일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100톤급 오징어채낚기선 ‘602 하나호’는 갑작스러운 강풍과 거센 파도로 인해 침몰 위기를 맞았다.

당시 하나호에는 모두 22명이 타고 있었는데, 기관실이 침수되면서 배가 침몰할 위기에 놓이자 유 선장은 선원 21명을 우선 구명보트에 태워 대피시켰다. 하지만 유 선장은 누군가는 배에 남아 구조요청 신호를 보내야 구명보트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끝까지 통신실에 남았다. 그는 결국 침몰한 배와 함께 유명을 달리했지만, 구조보트에 올라탔던 선원들은 유 선장의 구조요청으로 사고 발생 12시간 만에 다른 어선에 의해 전원 구조될 수 있었다.

구조된 선원들의 입을 통해 유 선장의 살신성인이 알려지자 그의 장례식은 국내 최초로 ‘전국 어민장’으로 치러졌다. 이후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추서했고 강원 속초시 엑스포공원에 유 선장의 동상이 세워졌다.

시맨십 정신은 단순히 자신이 탄 배 안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망망대해 위에서 뱃사람들은 서로 다른 배에 탔더라도 시맨십 정신을 공유한다. 지난해 3월 호주 브리스베인에서 대만 카오슝으로 항해하던 현대상선의 4,700TEU급 컨테이너선 현대 유니티호는 필리핀 인근에서 조난 구조 요청을 받았다. 유니티호 최종민(47) 선장은 즉시 기존 항로에서 64마일 떨어진 조난선박으로 이동해 인명구조 작업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고, 조난자 10명을 구조해 응급처치를 마친 뒤 미국 해안경비대 선박에 인계했다. 미국 해안경비대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최 선장은 “당연한 인도차원의 구조활동을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구조작업으로 유니티호는 계획했던 일정에 차질을 빚었지만, 항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다 위에서, 조난 구조가 경제적 이익보다 우선이었던 셈이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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