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입문 1년 만에 서울국제대회 국내 선수 1위
"라면으로 허기 채운 선수 인천 AG서 큰 일 해낼 것" 소속팀 지도자들 한목소리
한국 남자 마라톤의 세계 순위를 따져보면 ‘까마득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올림픽과 메이저 마라톤대회 입상은커녕 출전선수 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기록상 워낙 현격한 차이를 보이니 참가조차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 그러나 10년전만 해도 마라톤 하면 황영조, 이봉주 등 ‘프로’들이 지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동호인들의 마스터스 대회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프로들의 존재감이 없다.
실제 14년전 이봉주의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에서 여전히 뒷걸음질 치고 있는 형국이다. 세계기록 2시간3분23초에 비하면 4분 가까이 뒤처져 있다. 하다못해 10분 벽을 넘기도 숨가쁘다. 1990년대에 나왔을 법한 ‘2시간 10분 돌파=1억원 상금’대회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아시안게임으로 눈길을 돌리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진다.
한국은 1990년 베이징 대회 때부터 2002년 부산 대회까지 남자마라톤을 4연패한 저력이 있다. 2010년 광저우 대회때도 지영준(33ㆍ코오롱)이 정상에 올라 그야말로 아시안게임 마라톤 금메달은 한국이 미리 점지해 놓은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기록만 놓고 보면 일본과 카타르 등이 훨씬 빠르지만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라톤만큼은 한국이 ‘터줏대감’인 셈이다.
2014 인천대회도 마찬가지다. 그 중심에 심종섭(23ㆍ한국전력)이 출사표를 던졌다. 심종섭을 지도하고 있는 최경열(56ㆍ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한전마라톤 감독은 “심종섭은 한마디로 배가 고픈 마라토너다”라고 말했다. 목마른 갈증을 느껴야 물을 찾듯, 마라톤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광복 이후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스포츠를 지배한 정신은 ‘헝그리’(hungry)라는 말로 요약된다. 공교롭게도 헝그리 정신이 사라지면서 마라톤 기록도 퇴보했다. 최감독은 요즘 선수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헝그리 정신을 심종섭에게 읽을 수 있었다며 스카우트 배경을 털어놓았다.
심종섭이 마라톤에 입문한지는 불과 1년 남짓이다. 지난해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생애 처음으로 풀코스를 소화했다. 2시간20분대였다. 하지만 올해 같은 대회에서 2시간14분19초에 통과해 국내 선수 중 가장 먼저 결승선을 끊었다. 키170cm에 몸무게 59kg로 마라토너로서 이상적인 체격조건을 갖춘 심종섭은 원래 800m와 1,500m가 주 종목이었다. 2010년 진주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고등부 1,500m와 10km에서 금메달을 따내 최 감독의 눈에 띄어 고교(전북체고)졸업 후 한전으로 옮겼다. 최 감독은 마라토너로서 심종섭을 개조했다. 그는 “(심종섭의) 한눈 팔지 않는 우직한 스타일이 맘에 들었다”며 “고교때 장거리가 아닌 중거리를 했기 때문에 마라톤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특히 심종섭이 스물 세 해를 살아오는 동안 굴곡 거친 삶을 경험했다고 귀띔했다.
전남 나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심종섭은 편부 슬하에서 자랐다. 전북 정읍에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1학기만 다니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대신 그가 가야 할 곳은 세차장이었다. 가정 형편상 아버지와도 헤어져야 했다. 동네 ‘아는’ 할머니 집 지하 단칸방에서 숙식을 하며 2년여 세차장 알바를 하던 중 중학교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학교에 재입학 할 수 있었다. 늦은 나이에 공부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뜀박질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육상을 시작했다. 199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세계육상선수권 마라톤 4위 김재룡(48) 한전 코치는 “86년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를 ‘라면 소녀’로 기억하고 있지만 (심)종섭이야 말로 라면으로 허기를 채운 선수”라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 종섭이가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메달을 위해 하루 40~50km를 달린다는 심종섭은 “금메달포상금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수 있는 집을 마련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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