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생전에 아들이 쓴 기사를 오려뒀다. 종일 막노동을 한 뒤 무슨 짬이 날까 싶어 “사서 고생이시냐”고 타박하면 묵묵부답. 네모 반듯한 내 기사가 누렇게 쌓여갈 무렵, 아버지는 술기운에 기대 읊조렸다. “니 새끼(당시 난 미혼이었다) 보라고 그런 겨, 똑바로 썼는지 아닌지.” 머리가 멍했다.
그 뒤 내 기사를 내가 오린다. 아버지가 보관한 것까지 물려받아 신문사 입사 이후 15년 가까이 하나도 허투루 버린 게 없다. 대략 베낀 글도, 시켜서 마지못해 쓴 것도, 잘못 작성한 놈도, 욕을 바가지로 먹은 천덕꾸러기도, 밤 사이 지면에서 사라진 기사도 자를 대고 칼로 반듯하게 잘라 A4용지에 붙이고 비닐파일에 넣는다. 주말에 그걸 하고 있으면 아들이 칭얼댄다. “아빠가 쓴 기사야, 나중에 함께 보면서 얘기하자.” “놀아줘요.” 여덟 살짜리는 심드렁하다. 괜한 짓 하나 싶다.
그래도 52㎝ 두께의 기사뭉치는 어느덧 내게 백서이자, 매뉴얼이자, 영혼의 살점이자, 초심을 일깨우는 지침서가 됐다. 저마다 사연을 지닌 기사들은 게으름과 무사안일을 반성하라, 현장을 갈구하라, 약자에겐 약하게 강자에겐 강하게 맞서라고 다그친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알량한 양심마저 부끄럽게 만들었다. 기자라는 사실이 지금처럼 참담했던 적이 없다.“언론이 왜 이러냐”는 뭇 질문에 매체 범람, 속보 경쟁, 받아쓰기, 매뉴얼 부재가 이유라는 따위의 시답잖은 논평만 했을 뿐 제대로 한 게 없기 때문이다.
나는 1월부터 기획재정부에서 해양수산부까지 5개 부처를 관할하는 정책팀장을 맡고 있지만 해운 안전과 관련한 상황이 이토록 심각한지 몰랐다. 알려고 들지도 않았고 사고가 터진 뒤에야 문제점을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평소 관심을 갖고 취재하지 않은 죄, 그 수많은 문젯거리를 하나라도 미리 짚어주지 못한 죄, 벌받아 마땅하다(직무유기).
현장에 가라는 완곡한 지시는 다른 출장을 핑계로 피했다. 여러 차례 재난 현장을 다녀온 뒤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렸던 터라 해당 부서 소속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겼다. 기록을 위해 현장에서 눈물과 땀으로 부대낀 후배기자들보다 내가 더 욕을 먹어야 한다(책임회피).
정작 내가 만든 취재 매뉴얼에는 유가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사건팀장이던 2011년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 후 만든 재난취재 매뉴얼엔 ‘민폐를 끼치지 말자’‘현장은 생물, 능동적으로 대처’ 정도가 고작이다. ‘인물 스토리 발굴에 치중하라’고 밝혀두면서도 하지 말아야 할 질문 목록은 제시하지 않았다(매뉴얼 부실).
평소에는 정부가 발표하는 정책 보도자료 옮기기에 바빴다. 정책의 문제점을 독자, 국민 입장에서 파헤치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기계적인 기사작성 기술(스킬)만 늘었다. 현장의 목소리보다는 접대가 포함된 고위공무원들의 배경설명에 중심이 흔들렸다. 우왕좌왕 발표를 주도했던 부처의 담당 기자였다면 이번 참사 관련 오보는 고스란히 내 몫이었을 것이다 (무사안일).
그리하여 한낱 기자인 나는 이번 참사의 죄인이다. 단원고 학생의 지적처럼 ‘직업병’에 걸렸다. 어떤 비판의 대상이든, 너를 조준한 화살이 내게 박혔음을 고백한다. 기자입네 하고 거들먹거렸던 숱한 세월, 호구지책을 핑계로 외압과 읍소에 타협했던 날들을 깊이 반성한다. 그리고 여전히 부끄럽다.
일부 언론은 이념 따라, 입맛 따라 비극을 재단하고 제 것으로 만들기 바쁘다. 대통령이 진도에서 끼니로 때운 샌드위치를 살뜰하게 챙긴 기사는 씁쓸하고, 추모 모임에 나온 일부 엄마의 정당 가입 내역까지 까발리는 꼼꼼한 취재는 안쓰럽다. 국민을 순수와 불순으로 갈라놓고, 옷(衣)도 모자라 대통령의 식(食)까지 꿰고 있어야 하는 내 업(業)이 가련하다.
평생 세금 꼬박꼬박 내고 국민연금도 다 받지 못한 내 아버지가 생전에 기자 아들이 언론 그 자체인양 일갈한 바 있다. “국민을 바보로 알아.” 최근 한달 주변에서 많이 들은 말이기도 하다. ‘남 탓’으로 벌어먹고 사는 내 직업의 무게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 글도 오려져 스크랩 되리라, 훗날 아들에게도 사죄하기 위해.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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