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우리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선명한 사계절을 가졌다는 것이다. 먼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궁금해할 때 최고의 자랑거리는 사계절이라고 힘주어 소개한 적이 여러 번 된다. 물론 사계절을 가진 나라는 많을 것이고 어쩌면 누구나 그 계절에 속해 살 것이지만 나에겐 우리에게 주어진 사계절이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는 고집이 있다. 우선 우리나라엔 산이 많으며 바다는 말할 것도 없다. 산과 바다가 주는 풍요로움은 어떤 세계의 변화무쌍함도 무색하게 한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그 선명한 계절에 맞춰 살아온 터라 우리들은 변덕스러우며, 내면에 겹이 많으며, 어느 한 편으로 사람 맛이 진하다.
나 또한 이토록 번화한 계절 속에 살다 보니 계절마다 찾는 것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음미하는 행복 때문에라도 즐거이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 계절에 쫓기듯 사는 사람은 아니고 싶어서가 맞다.
이런 봄에 나의 주인공은 당연 모란이다. 모란의 향이며 품이며 자태는 언제나 나를 벌로 만든다. 사람 없는 밤이나 아침에 모란을 보러 모란 피는 공원으로 산책하러 가니 이 정도면 영락없이 벌이나 다름없다. 화려하지 않음이, 그 묵묵함이 착하고 고운 사람의 무르팍 같기만 한 것이다. 그 붉기가 열흘을 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도 모란 같은 넉넉한 사람이 제일이다.
한때 내 가을의 일은 단감을 탐하는 것이었다. 감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여행길에 사온 단감을 식사대용으로 먹던 중에 단감에서 나는 떫은 기운이 좋은 사람한테서 나는 진(津)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소설 쓰는 선배에게 농담 삼아 단감 같은 사람 만나서 연애하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가, 아마 그런 사람은 없을 테니 불가능할 거라는 농을 들었다. 그토록 불가능한 맛까지 품은 단감은 먹어도 먹어도 한참을 먹게 만드는 귀신이어서 나의 가을은 그렇게 익어가거나 소비되곤 하였더랬다.
겨울을 기다리는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눈(雪)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인연이 눈으로 왔다가 눈으로 간다고 믿는 민망할 정도의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결국은 사람도 눈이라고 믿는 비과학적 인간형의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을 믿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동시에 철석같이 사람을 믿어서 스스로 눈처럼 녹아버리는 형국을 자처하고 만다. 여러 번이 아니라 실은 거의 매번 그렇다. 눈 이야기가 하다 보니 생각나는데 대뜸 어린아이가 그리움이 뭐냐고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리움은 눈 같은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해되었다는 듯 확신에 찬 얼굴로 ‘그럼, 그리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라는 질문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으니 나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긴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사람이 어찌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은 보기 나름이고 그 나름이 사람을 형성한다. 실없는 소리라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빠져 지내는 것 한 가지가 지금의 당신을 설명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지나가는 것을 잡고 싶은 그 마음이 계절을 붙들게 하며 결국 그 계절을 진하게 살게 한다.
사람에게도 계절이 있어 사람은 무한한 성장을 겪는다. 성장뿐만 아니라 견디게 하는 능력도 주었다. 그러니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지금 어떤 계절을 어떻게 살고 있다고 술술 답하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사계절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어디를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바쁘게 산다는 구실로 계절을 유기하는 것은 사람의 성장을 늦출 뿐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고장 내고야 만다.
이 봄이 지나면 곧 여름이 닥칠 것이다. 여름이 되어도 살처분의 대상을 색출하는 작업은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늘 아래 다 드러나기 전에 얼마가 되든 안 되든 우리는 마치 공범인 듯 이 계절 앞에 일말의 죄를 꺼내 널어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계절을 통해 성장을 거쳤으나 아쉽게도 죄를 고백하는 법에 대해선 아직 채 배우지 못한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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