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별
해금 연주자
2002년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고, 한국과 일본을 정신없이 오가며 연주자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어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 시작한 일본 생활은 쉽지 않았다. 연습 할 곡은 산더미 같았고, 일본의 이곳저곳에서 잡힌 수 많은 공연들을 소화하기엔 늘 연습 시간이 부족했다.
시즈오카에서의 공연. 새로운 레퍼토리로 하게 된 ‘스페인‘이라는 곡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는 날이었다. 이 곡은 ‘척 맨지오니’가 쓴 재즈곡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리듬에 한국전통 악기로는 쉽게 연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한참 전부터 연습해 왔지만 처음으로 공연에 올리는 날엔 무척 떨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워낙 어려운 곡이라 무대에서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한 시간 반 공연에 마지막 곡으로 순서를 정하고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이 곡만 악보를 보고 하기로 마음먹었다.
리허설 때 악보를 보고 연주를 하니 연습 때와 다름없이 잘 되었지만, 두려운 마음이 가시지는 않았다.
리허설이 끝나고 분장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프로듀서가 와서 문을 벌컥 여는 것이다. 무대에 놔두었던 스페인 악보를 내던지며, “왜 이걸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불안해서 그렇다면서 악보가 있으면 덜 불안하다고 했다.
프로듀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냅다 소리를 지른다.
“이럴 거면 관둬! 넌 무대에 설 자격이 없어!”
나는 너무 놀라고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프로듀서의 말은, 프로 연주자가 무대에서 감히 악보를 보고 연주를 하겠다니 그게 말이 되는 생각이냐, 완벽한 연습 후에야 무대에 설 수 있지 무대를 뭐로 보고 이렇게 안일하냐는 것이었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며 나에게 프로 운운하는 그를 보면서, 정말이지 때려치우고 한국에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도 짓밟히고, 너무나 서운했다.
분장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잠시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거울에는 호되게 야단 맞아 기가 죽은 초라한 내가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세수를 하고 내동댕이쳐진 악보를 주워와 앉았다. 공연까지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세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곡만 연습했다. 그리고 무대에 올랐다.
세수만 한 얼굴 그대로 의상만 갈아입었다. 그리고 한 시간 반. 드디어 마지막 곡. 스페인.
관객들은 환호했고, 앙코르를 세 번 받았다. 앙코르 세 번째 곡을 마치고 무대 뒤로 걸어 들어오는데, 내 앞에 프로듀서가 서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언제 그렇게 화를 냈느냐는 듯 밝은 얼굴로!
그때의 그 기분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당당한 마음이었다. 동시에 겸손한 마음도 들었다. 더없이 차분하지만 날듯이 기뻤다. 나를 무시하던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해준 것이다.
그 날, 뒤풀이 술자리에서 프로듀서가 그랬다. “네가 이겼다. 이겨 줘서 고맙다.”
인터뷰에서 많은 분이 물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며 전통음악 연주자로서 한국 음악을 일본에 전하겠다는 등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느냐고. 그때 나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나의 무대를 ‘책임’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이를 악물고 연습했고, 수없이 많은 순간 눈물을 참았다. 때로 밀려오는 무시무시한 고독함에도 무대에서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며 행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행복할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다.
지금은 국악방송 진행을 맡게 되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것이 내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이것 역시 최선을 다한다. 그 아이들은 내 책임이다.
방송에서는 피디, 작가, 진행, 그리고 청취자 모두 각각의 책임을 다한다. 학생과 선생도 그렇다.
우리는 유기적으로 얽혀서 서로의 책임 안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고맙다. 모두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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