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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후진성'이 낳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입력
2014.05.2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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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사고 36일째인 21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수색작업 현장으로 떠나는 해경 경비정을 바라보고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 36일째인 21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수색작업 현장으로 떠나는 해경 경비정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국가인가" 탄식이 언론을 뒤덮고

전근대적 적폐를 사고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이윤의 무한추구를 위해 최소한의 도덕마저 소멸시키며

극단으로 치달은 한국 자본주의가 원인 아닐까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여객선 사고에 그치지 않고 국가에 대한 질문을 정면에서 제기하는 사건이었다. 마치 타이태닉호 침몰이라는 상징적 사건이 유럽의 성장주의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던 것처럼,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면, 각자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너나없이 반성하자는 목소리는 같은데, 지목하는 참사의 원인은 제각각이다. 세월호 참사가 단일하지 않기 때문에 강조점을 어디에 두는지 여부에 따라서 원인 진단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일차적으로 세월호 참사는 청해진 해운과 선장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안전 규정을 무시하고 점검을 소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 사고로 끝날 수 있었을 상황이 참사로 번져갔던 원인은 해경을 비롯한 국가의 부실 대응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가 사고의 책임을 따지는 상황에서 국가의 의미를 묻는 상황으로 확대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여기에 진두 지휘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전면에 나선 것도 이 사안을 국가의 문제로 나아가게 하는 데 한몫 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재난이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런 현상이 '순수'하지 못한 시민들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박 대통령도 이런 사태를 야기하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이 바로 '적폐'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정부의 부실 대응을 야기한 원인으로 한국의 전근대성을 지목하는 목소리와 묘하게도 화음을 이룬다. 박 대통령의 논리에 따르면 적폐는 비정상적인 것이고, 이것을 정상화하는 것이 이른바 국정기조인 것인데, 말할 것도 없이 비정상의 정상화가 전제하는 것은 전근대성을 타파하는 정상국가의 완성을 의미한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구조 현장을 보면서 한국의 후진성을 새삼 실감했다는 '증언들'이 인터넷 게시판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쏟아져 나온 것이나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개탄이 언론을 뒤덮은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경제 규모에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는데, 그에 걸맞은 국가의 꼴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자각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선진국이라는 표현의 뉘앙스에 이미 담겨 있는 의미가 바로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후진국 또는 비정상적인 국가를 발전시켜서 선진국 또는 정상적인 국가로 가야 한다는 발상이 여기에 드리워져 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한국의 전근대성을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한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만 유독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선진국이라면 발생할 수 없는 참사라는 논리가 정치적 입장을 떠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전근대성의 책임 소재를 각자 유리한 대로 따져 묻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아마 이 문제의 정점에 ‘해경 해체’를 선언한 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있을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서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감염 부위를 도려내야 한다는 위생학적인 상상력이 이런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리라.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이 바로 면역성을 만들어내는 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이권보다도 증여를 통한 호혜평등의 원칙으로 작동한다. 이런 상호주의를 지탱하는 것이 위기나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면역성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안전에 대한 열망은 바로 이런 공동체와 면역성의 상관관계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내 가족’을 위한 면역성이 지나치게 강하면 공동체가 위협받듯이, 특정 집단의 안전만을 강조한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권력만을 지키려는 경향이 노골화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정부가 보여주는 행태나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점은 한국이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세월호 참사는 그 어디보다도 한국의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당장 선령 제한을 해제하고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세월호야말로 이윤 추구의 막장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선장이나 유병언 일가의 뻔뻔함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최대의 이윤을 추구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의 원인을 적폐나 부정부패 같은 애매한 도덕 규범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이런 참사가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 정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월호 선장을 살인자로 규정하고 유병언 일가를 일망타진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세월호의 적폐야말로 전근대성이라기보다 고도화한 한국 자본주의의 실상이 아닐까.

당장 눈을 돌려보더라도, 이른바 전근대성과 관계없어 보이는 선진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대형 참사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영국의 셰필드 힐스버러 축구장 붕괴사고나 런던 패딩턴 열차 사고를 전근대성과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던 총기 테러 사건의 원인이 전근대성이라고 주장할 이들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또 어떤가. 카타리나 태풍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낸 뉴올리언스 참사가 있었다. 따라서 충분히 근대화된 국가라고 하더라도 대형 참사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그 참사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정부의 능력일 것이다.

이런 능력을 효율성과 동일시했던 것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역대 정부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이었다. 이때 말하는 효율성이라는 것은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과를 발휘하는 이윤 추구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언제 발생할지도 모를 재난에 대비해서 막대한 국가예산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비용을 민간에게 넘기면서 상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민영화의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지점이다. 예산을 적게 쓰는 '작은 정부'가 효율적이고 좋은 정부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진보 정부가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은 이윤의 무한 추구에 있다. 정부는 이런 자본주의의 법칙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위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폴 크루그먼이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했고, 최근 세기 자본론에서 토마 피케티도 동의했듯이, 자신만만하게 신자유주의가 주창했던 방식으로 불평등의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삐 풀린 자본주의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는 한편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너도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겼다. 한때 우리에게 부동산과 증권으로 대표되었던 거품경제는 성장 없는 자본수익률의 증가가 만들어낸 신기루였던 것이지만,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둘도 없는 기회처럼 보였다.

한국의 경우는 어땠을까. 국가 주도로 경제성장을 추진해왔던 근대화 과정이 말해주듯이, 국가를 통해 자본가가 육성된 경우가 한국이다. 민주화는 인권과 평등이라는 시민권의 가치가 확산되는 과정이자 동시에 국가에 복속되어 있던 자본가가 해방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습관적으로 부르는 서구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사상의 핵심은 자유주의였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면 사유재산이라는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정치권력에게 개인의 경제활동을 침해하지 않도록 만드는 자유주의의 논리는 정교한 도덕철학의 논리 위에 서 있다. 이런 도덕철학의 규범과 시장경제의 법칙을 조율하는 정부의 기능이 바로 근대성의 요소라고 불린다. 지금 한국에서 결핍되어 있는 것은 도덕과 경제를 매개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이 역할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 정치적 입장을 떠나 확인할 수 있는 공통의 주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효용성과 자본주의는 아무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도덕을 통해 규제되는 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일까, 아니면 도덕 따위는 필요하지 않는 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일까. 이윤의 무한추구를 위해서 최소의 도덕마저 소멸시킨 한국의 자본주의야말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도달한 순수한 자본주의인 것은 아닐까. 이 순수성을 다른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면역체계가 비대해져서 마침내 공동체의 공동선마저 붕괴시킨 것이 세월호 참사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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