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피우던 베트남인 판만차이(62)씨는 소맷귀로 눈물을 훔쳤다. 손에 들린 웨딩사진에는 2005년 결혼해 한국으로 온 딸 한윤지(29ㆍ귀화ㆍ본명 판녹탄)씨와 사위 권재근(52)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겠다며 청소 등 허드렛일도 마다 않던 딸과 사위, 손주들이 눈에 선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달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그는 딸을 잃었다. 사위와 손자 권혁규(6)군은 아직도 실종상태다. 손녀 권지연(5)양은 살았지만 “엄마 아빠 오빠가 나만 두고 제주도로 이사갔다”며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베트남 남쪽 땅끝마을 까마우에서 새우잡이 일을 하는 판만차이씨와 윤지씨의 여동생 판한(24)씨는 세월호 참사 다음날 주한 베트남대사관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이웃에게 경비 300만원을 급히 빌려 지난달 19일 입국했다.
지난 한달 간 경기 수원에 있는 처조카 배수정(26ㆍ귀화ㆍ본명 루엔녹마이)씨의 집에서 머물고 있지만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변변한 도움 한 번 받지 못한 채 사실상 방치돼 있다. 당시 정부는 “유가족 지원에 소홀함이 없게 하겠다”고 했으나 판만차이씨 부녀는 입국 한 달이 되도록 심리치료조차 받지 못했고, 통역도 충분치 않아 팽목항 현장에서 냉가슴만 앓았다.
지난 13일 처조카의 남편 노동환(49)씨와 함께 경기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헌화한 뒤 경기도합동대책본부를 찾았을 때 그는 한국 공무원의 전형적인 ‘책임 떠넘기기’를 경험했다. 딸과 사위, 손자를 잃은 충격에 술 마시지 않고는 잠에 들지 못하고, 심한 불안감과 우울증세에 시달려 심리치료와 말벗을 해줄 베트남 사람의 방문 등이 가능한 지 알아보려 했지만 대책본부의 각 부서는 “베트남 분이라서 우리 업무 소관이 아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체재비라도 일부 지원 받을 수 없을까 문의했지만 대책본부 관계자는 “유가족 지원은 주소지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윤지씨 가족이 주소를 옮긴 제주에 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만차이씨 부녀가 머물고 있는 곳은 수원이어서 지원을 받기 위해 제주까지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데 모여 슬픔을 나누는 다른 유가족과 달리 이들은 기댈 곳 없이 이국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행정편의주의에 밀려 심리치요와 지원 등 도움의 손길에서 비껴 나 있는 것이다. 처조카사위 노씨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다독이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 다들 이렇게 무관심한지 모르겠다. 같은 유가족인데 한국 사람이라면 이렇게 했겠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앞서 입국 직후 전남 진도 팽목항에 내려갔을 때도 판만차이씨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난달 23일 딸 윤지씨의 시신이 발견되자 지역 한국어교실에서 나온 통역들이 모두 철수했고, 판만차이씨 부녀는 밥도 못 먹은 채 이틀 동안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다 25일 수원 처조카 집으로 올라와야 했다.
그는 “(딸이) 이국만리에서 변을 당한 것도 서러운데 귀화했다는 이유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가슴 아프다”며 “하루 빨리 사위와 손자의 시신을 찾아 딸과 함께 장례를 치를 수 있기만 빌고 있다”고 말했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입국한 지 한 달. 그 사이 하루 담배 반갑을 피우던 판만차이씨의 흡연량은 한갑 반으로 늘었고, 우울증 때문에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방긋 웃는 조카 혁규군의 사진을 보던 판한씨는 “대책본부에서 ‘도움 줄 수 있는 부분은 돕겠다’는 말을 분명히 했는데, 여태껏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했다.
노씨는 씁쓸한 듯 말했다.“다른 희생자들도 많은데, 안그래도 소외 받는 다문화 가정까지 누가 챙기겠어요. 그게 가장 슬픈거죠.”
수원=글ㆍ사진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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