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분리독립 주민투표 시행을 연기하자고 제안했으나 동부 지역 분리주의자들이 공식 거부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세력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들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연극을 하고 있다는 비판적 해석이 동시에 나온다.
푸틴은 7일(현지시간) 러시아에서 디디에 부르크할터 스위스 대통령 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의장과 부르크할터와의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위기의 장기적 해법은 평등하고 개방된 대화”라며 친러 세력까지 포함한 당사자 회담을 제안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 시민 보호를 명목으로 무력 개입까지 시사했던 기존 입장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푸틴의 발언을 둘러싼 해석의 혼란은 당사국 반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르세니 야체뉴크 우크라이나 총리는 “우크라이나에선 어떤 주민투표도 계획된 바 없다”며 푸틴의 투표 연기 제안을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친러 민병대가 11일 도네츠크, 하리코프 등 동부 도시에서 실시하려는 주민투표는 불법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신중하게 환영의 뜻을 밝혔다. 젠 사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우크라이나 주민투표는 불법인 만큼 푸틴 대통령이 연기를 제안하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니 어니스트 백악관 부대변인은 우크라이나 접경에 배치했던 병력을 철수했다는 푸틴의 또 다른 발언에 대해 “아직 증거는 없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동부 지역 분리주의자들은 주민투표 강행 결정이라는 의외의 수를 두었다.
이들은 푸틴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동부 지역 분리·독립 여부에 대한 주민들 의견을 묻는 주민투표를 11일 예정대로 실시하기로 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 등에 따르면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의 친러 분리주의자들은 푸틴의 제안이 나온 지 하루만인 8일(현지시간) 자체 회의를 통해 주민투표를 예정대로 실시하기로 했다. 도네츠크주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이 자체 선포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 공동의장 미로슬라프 루덴코는 “도네츠크주가 주민투표로 독립을 결정하면 루간스크, 하리코프, 오데사, 니콜라예프스크주 등 우크라이나 동남부 다른 지역들과 연합해 독립국(노보로시야)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며 이같이 밝혔다.
분리주의 세력이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거나 최소한 러시아와 자신들의 활동을 긴밀히 조율하고 있을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왔기 때문에 이들이 푸틴 대통령의 제안을 따를 것으로 예상됐다.
분리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와의 협상력을 키우기 위한 강경파의 역할을, 러시아는 국제사회와의 협상을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나눠 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 공보비서(공보수석)는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세력이 주민투표 강행 방침을 밝힌 것과 관련 “상황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며 논평을 자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세력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푸틴의 느닷없는 평화공세를 두고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의 이해가 반영된 현실적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세르게이 카라가노프 러시아 고등경제대 교수는 지금처럼 친러 민병대의 배후에서 무력갈등을 부추겼다간 자칫 동구권 붕괴에 따른 연방 해체 과정에서 러시아가 통제할 수 없는 다발적 내전에 휩싸인 유고슬라비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점을 푸틴 정부가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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